먼지의 말 / 채효정 지음 / 포도밭 펴냄 

이 사회에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곧 수동태 문장으로 자서전을 쓰는 일이다. 수동태 문장으로 하루에 한 줄씩 삶을 ‘당하는’ 일이다. ‘타성에 젖는 맹렬한 쾌락’에 사로잡히지 않고 능동태 문장으로 된 자서전을 쓸 때 새로운 공동체는 시작될 것이다. -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김영민 

수년 전에 서점 관련 협동조합 실무자로 2년 정도 일을 했었다. 만 2년 만에 채산성 악화로 사업을 접었는데, 해체 이후 1년간 북산면 부귀리에서 요양 생활을 해야만 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국 각지의 학교와 도서관에 도서납품을 대행해주는 전국단위 협동조합. 학교도서관이 열리는 신학기와 공공도서관의 예산집행이 시작되고 마감되는 9개월의 성수기에는 하루 16시간 노동. 납품 동선이 겹치는 두어 달은 일주일에 10시간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분기별로 이루어지는 조합 감사에서 새벽 1시에 시켜 먹은 치킨 배달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는데, 저녁을 먹을 시간이 없었던 십여 명의 직원들은 밤을 꼬박 새우고도 죄인 신세가 되었다. 나는 정말이지 그때를 후회한다. 내가 선택한 일자리, 나와 함께 죽을 것 같았던 노동을 함께한 동료들, 정확히 ‘협동’만 빠진 협동조합이 그리 쉽게 무너진 것을 후회하는 게 아니다. ‘최소비용 최대이익’ 앞에 무기력해진 일상을 견뎌내는 것에 익숙해진 나를 후회한다. 인간 위에 군림한 모든 욕망에 저항하지 못한 시절을 진저리치게 후회한다. 나는 ‘있지 않은 존재’가 아니라 ‘없지 않은 존재’다. 

노동해방의 의미는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로부터 노동을 해방하는 것이며, 그 목표는 노동하지 않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다운 노동에 있다. 노동해방이 임노동을 철폐하는 노동계급의 주체적이며 능동적 운동을 의미한다면, 탈노동은 자본에 의한 노동의 해체를 필연적이고 객관적인 사태로 둔갑시키는 기술적 용어다.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은 노동으로부터의 탈구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철폐하는 길이다. -본문

저자 채효정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다. 강사 자리를 11학기나 하게 해줬으면 많이 ‘배려’해 준 것인데 은혜도 모르고 설치다(!)가 해고 통지를 받았다. 임명권자의 시혜와 은전에 대항한 배은망덕한 먼지. 이 책은 이 세상 모든 먼지들의 말이다. “거기서 잘렸으니 거기로 돌아가야죠.” 그녀가 고작 월 60만 원짜리 시간강사의 자리로 애써 돌아가려는 이유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물러서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이고, 더 물러설 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다고. 나아간 자리가 아니라 물러서지 않은 그 자리가 해방의 자리라고 말이다. 다시 정치의 계절. ‘많음’에 굴하지 않고 ‘옳음’에 대해 말해야 할 때다. 세상이 뿌옇다.

류재량(광장서적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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