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기원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명인 자크 데리다는 1990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맹인의 기억들, 자화상과 폐허(Memoirs of the Blind: The Self-Portrait and Other Ruins)”라는 이름의 특별전을 기획하였다. 그는 이 기획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의 그림들을 모아 전시를 하였다. 가장 시각적인 장르인 회화에 맹인이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독, 이 전시회 도록에 실린 조세프-브누아 쉬베의 <디뷰타드 혹은 그림의 기원>이 눈에 띄는데. 그가 왜 눈먼 맹인과 그림을 연결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에 답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램프만이 어둠을 밝히는 방 안에 한 여인이 남자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으며, 여인을 부둥켜안은 남자의 얼굴은 위로 젖혀져 있다. 여인은 앉아있는 남자 위로 몸을 숙이고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따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곧 있으면 멀리 떠날 연인과의 이별을 앞두고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벽에 그림을 그리는 디뷰타드에 대한 그리스 설화의 장면이다. 

데리다는 이것을, 드로잉이 지각보다는 기억에 더 의존한다는 것, 그림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기원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은유로 제시하였다. 여인은 남자의 흔적을 따라 그리고 있는 동안 그를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인은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이중으로 눈이 먼 장님이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눈이 멀었으며, 또한 그를 그리는 동안 그를 볼 수 없으므로….

회화에 있어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순간 대상은 시야에서 사라지며, 대상을 관찰하게 되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러므로 화가는 대상과 화면을 동시에 볼 수 없으며, 어느 한쪽에 대하여 반드시 눈이 먼 맹인이 된다. 끓임 없는 사라짐과 나타남 사이의 반복과 직조를 통하여 비로소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또한 <디뷰타드 혹은 그림의 기원>에서 ‘그림자’는 현전과 부재를 담고 있는 이중의 기호이다. 우선 그것은 그림자를 만들어낸 대상이 인접해 있으므로 현재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동시에 그림자에는 물체 자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부재를 내포하고 있다. 마치 이제는 사라졌으나 머릿속에 각인되어 실재를 상기시키는 ‘기억’과도 같다.

고대 동굴벽화에서부터 인류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보이는 것을 그리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을 기억하고자 그 흔적을 남기려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마치 오늘 밤 나를 떠나는 사람을 기억하려는 디뷰타드의 여인처럼 말이다.

정현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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