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서지방에서 가장 큰 농수산물 도·소매 시장 

육림고개는 본래 마가리 고개라 불렸다. 조양동에서 홍천, 원주 방면으로 가기 위해선 이 작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고갯길은 중앙시장까지 뚫렸다. 한국전쟁 후 중앙시장이 자리 잡으면서 고갯길까지 장사치들이 들어찼다. 열 평 남짓한 점포들이 촘촘히 들어섰다. 그 사이사이로 노점상이 좌판을 깔았다. 생선, 정육, 야채, 과일, 미곡 등 농·수·축산물이 빼곡하게 깔렸다. 양구, 화천, 홍천, 가평 등에서 이곳으로 장을 보러 나왔다. 상인들은 “중앙시장에는 의류와 잡화점이 많았고 생물은 육림고개가 더 많았다”고 전했다. 

도매시장 구실도 했다. 동네 작은 잡화점이나 야채 가게는 물론 행상들도 여기서 물건을 떼어다 팔았다. 이곳은 1996년 춘천농수산물도매시장이 생기기 전까지 번개시장과 함께 도매를 했다. 

젊은 시절 중앙시장 부근에서 노점상과 행상을 하며 세 자녀를 키운 안봉예(80) 어르신은 “육림고개에서 과일과 미곡을 떼어다 머리에 이고 다니며 행상을 했다”고 기억했다. 

생강으로 유명한 전북 완주 봉동에서 생강을 받아다 팔던 봉동상회는 지금도 한 자리에서 대를 이어 도매업을 하고 있다. 방앗간과 기름집도 줄줄이 있었다. 미곡상이 많아 강냉이집도 덩달아 늘었다. 지금도 3개의 강냉이집이 성업 중이다. 도·소매를 함께 하니 시장은 늘 바글바글했다. 사람들의 어깨를 부딪치며 족히 30분은 헤치고 나가야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고갯길을 따라 선 건물들은 중앙시장과 비슷한 구조였다. 1층에선 장사를 하고 2층에선 살림을 살았다. 지금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장사를 하는 조양정육, 영진이불, 동신고무 등이 다 그런 집이었다. 2층은 셋방을 주기도 했다. 

춘천을 배경으로 영화 ‘다른 길이 있다’(2017)를 만든 조창호 감독은 고등학교 때 육림고개 맨 꼭대기에 자취방을 얻었다. “지금의 신한은행(옛 강원은행) 건물 전면에 노란색 유리가 끼워져 있었는데 해가 저물 때면 햇살이 창문에 반사되어 자취방을 노랗게 비췄어요.” 육림극장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영화의 꿈을 키우던 시절을 그는 잊을 수 없다. 

영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청춘들의 거리  

1967년 고개 아래에 육림극장이 생겼다. 육림극장은 서울에 있는 개봉관과 동시에 영화를 개봉했다. 대형 스크린과 널찍한 관람 공간을 갖춘 강원도 최고의 극장이었다. 나중에는 3관까지 확장했으니, 말하자면 춘천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이었다. 육림극장은 강원도 청춘들의 로망이었다. 영화 구경하러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렸다. 주말이면 끝도 없이 줄을 섰다. 정당이나 단체에서 하는 대규모 행사도 여기서 열렸다. 극장 위로 난 고개 이름도 육림고개로 바뀌었다. 

육림고개 넘어 중앙시장 옆에는 문화극장이 있었다. 육림고개에서 나고 자라 가업을 이어받은 박준석 봉동상회 사장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엔 매일 아침이면 용돈 100원을 받아 문화극장에 갔어요. 휴가 나온 군인이 애인과 극장에 오면 그 옆에 슬그머니 따라 들어가 자리를 옮겨가며 종일 영화를 봤어요. 경찰의 감시석인 검인석에 앉아 스파이007을 본 기억이 여태껏 선명해요”라고 회상했다. 

중앙시장 건너편 지금의 시장 주차장에는 중앙극장이 있었다. 조운동 시청 앞에는 소양극장(폐관한 피카디리 극장의 전신)이 있었다. 춘천 원도심은 가히 영화의 거리였다. 영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쏟아져나왔다. 육림고개와 명동, 운교동은 청춘의 터전이었다. 

군데군데 들어앉은 선술집은 늘 취객으로 북적거렸다. 최돈선 춘천문화재단 이사장은 “작가 이외수와 육림고개에 있던 고리끼라는 주점에서 종종 술을 마셨다”라고 술회했다.다음에 계속

김효화 (춘천원도심 상권르네상스 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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