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미라는 낱말이 낯설어서 밤에 사전을 폈다

무엇의 꼬리 같은 이 말을 탐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다가, 근원 없이 어지러운 우리말이라는 걸

말의 촉각이 닿을 수 없는 오래된 말이라는 걸 알고는

알 듯 모르는 모든 말의 꼬리에 실을 매달아 보내고 싶었다

빌미라니, 한 생의 꼬리를 감추고 숨어버린 신의 머리카락 쯤 되려나

겨누고 싶지만 빗나가는 말의 화살이 있다면, 저 빌미쯤 되겠지만

당신 없는 오후에 사전을 뒤적인 것은 빌미라는 말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한 슬픔이 또 한바탕 오려던 찰라, 이 슬픔의 빌미가 된 것은 무엇인지

발꿈치를 들고 숨어버린, 세상의 어느 조용한 시간에게

잠시 따져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민왕기 시집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 중에서

‘빌미’를 입속에 넣고 굴려본다. ‘빌미’라는 명사, 무엇의 꼬리 같은 이 말을 탐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다가, 말의 촉각이 닿을 수 없는 오래된 말이라는 걸 알고는 빌미라는 말뜻보다 감정의 촉각을 오롯이 세운다. 발꿈치를 들고 신의 머리카락이나 숨은 슬픔이 무엇인지 골똘히 감정의 실마리를 끌어당긴다. ‘무량’이나 ‘어둑’처럼 형용사를 명사로 만들던, 애초에 명사든 ‘조금’처럼 부사든, 의외의 과일이거나 음식이든, 그는 말의 결이 환기하는 감정을 온전히 살려낸다. 그의 말이 가 닿는 건너편에 당신 상처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돌고 돌아온 말의 결이 시의 풍성함이다. 

한승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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