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 볶는 오후’ 서종성 대표

춘천세무서 앞 도로를 건너 옛 캠프페이지로 향하는 길을 조금 걸어가면, 어디선가 깨를 볶는 고소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와 후각을 즐겁게 한다.

이윽고 눈앞에 나타난 향기의 진원지, 방앗간 ‘깨 볶는 오후’. 작업복 차림의 서종성 대표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시민언론협동조합 ‘춘천사람들’의 조합원이기도 한 서 대표는 몇 해 전까지 그곳에서 ‘사과나무 돈가스’를 운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를 정리하고 방앗간을 연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이유를 묻고 염려도 전했다. 그로부터 약 3년, ‘깨 볶는 오후’ 대표상품인 생들기름과 참기름은 지역에서 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지난해 농업발전에 이바지한 공으로 농협중앙회 춘천시지부장 상을 수상하는 등 승승장구 중이다. 서 대표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깨 볶는 오후’와 서 대표는 이제 춘천의 주부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다. 하지만 ‘깨 볶는 오후’ 이전의 삶이 궁금하다.  

춘천이 고향이고, 충남대 토목공학과 88학번이다. IMF 시절이었지만 운 좋게 한양종합건설에 취업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불황 여파로 96년에 구조조정을 당했다. 이후 춘천으로 돌아와 당시 어린이회관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한 친척에게 수제 돈가스 만드는 법을 배워서 퇴계동에 ‘돈가스와 치킨마을’을 차렸다. 하지만 신통치 않아서 지역의 한 건설회사에 재취업했다. 그러다 2002년에 회사를 나와서 ‘호남정기화물택배 춘천영업소’를 차렸다.

당시 택배산업이 정말 호황이었다. 특히 ‘MBC 현대조각전’, ‘힘 있는 강원전’, ‘강원미술대전’ 등 예술작품 특수운송까지도 했었다. 차량 6대에 기사 6명이 쉴 틈 없이 바빴다. 그런데 택배산업이 커지면서 경쟁이 치열해지며 매출이 10분의 1로 줄었다. 설상가상 ‘까대기’와 누적된 과로로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래서 정기화물을 정리했다. 

이후 몸은 아픈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다가 수제 돈가스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으니 2016년에 다시 수제 돈가스 가게 ‘사과나무 돈가스’를 창업했다. 장사는 잘됐다. 그런데 팔면 팔수록 손해를 봤다. 수제 돈가스인데 워낙 저렴하게 팔다 보니 남는 게 적었다. 겉보기에는 괜찮았지만 안으로는 위기였다.

그런데 아무 기술도 경험도 없는 방앗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어느 날 방앗간 경험이 있는 친구가, 웰빙과 친환경 먹거리가 유행이니 전망이 좋을 거라며 방앗간을 같이 해보자고 제의했다. 고민 끝에 ‘사과나무 돈가스’ 문을 닫고, 내부 구조도 바꾸고 방앗간 기계설비를 들였다. 그런데 이거 참(한숨). 친구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다. 고스란히 내 몫으로 남은 투자비도 문제지만, 경험도 기술도 없으니 눈앞에 기계들은 그저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막막했다. 그게 2019년 5월 무렵이다. 한동안 별별 생각이 다 들더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시 춘천의 방앗간 60여 개 중 생들기름을 짜는 곳은 없었다. 무릎을 쳤다. 생들기름을 만들면 경쟁력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까짓거 나 혼자 한 번 해보자’. 이후 몇 달 동안 독학으로 냉압착 생들기름 짜는 법을 공부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방앗간 설비업자를 졸라서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생들기름은 들깨를 전혀 볶지 않고 생으로 내린 기름이다. 양질의 기름을 얻기 위해 실패를 거듭하며 낯선 분야를 파고들었다. 한편 “주부들이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인 오후에 깨를 볶는다”는 의미를 담아 방앗간 이름을 ‘깨 볶는 오후’라고 지었다. 2019년 8월 드디어 ‘깨 볶는 오후’ 간판이 올라가고 초가을에는 첫 생들기름을 출시했다.

출시했을 때 소비자의 반응은 어땠나? 그리고 이후의 행보를 들려달라.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춘천에서 생소했기에 주부들이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작업공간도 위생적이고 청결하니까 깨를 직접 가지고 와서 기름을 짜달라는 주부들도 많았다.

이후 제조업으로 허가를 받아서 2019년 12월에 신북 농협 로컬푸드 직매장 입점을 시작으로 차례로 동춘천농협과 소양로 춘천농협 하나로마트 등에 입점했다. 2021년 4월에는 농업회사법인 ‘굿투유’를 설립하고 연구개발전담부서도 만들었다. 또 6월에는 강원도지사 품질인증(엄지척)을 받았고 7월에는 ISO 9001과 14001 인증을 받았다. 속초와 수원에 가맹점이 생겼고, 강원도농수특산물진품관 강남점에 입점했다. 최근에는 롯데백화점 노원점과 강남점에서 열린 상생마트 ‘강원특산품 한마당’에 초청받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낯선 분야에 뛰어들어 짧은 시간에 큰 성과를 얻었다. 친구가 약속을 어겼지만 그래도 마냥 밉지는 않겠다.

그렇다. 원망스럽지 않다. 오히려 고맙다.(웃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도전하니까 새로운 길이 보이더라. 삶의 전환은 때로는 엉뚱하거나 속상한 계기로도 올 수 있다. 마음먹기 달렸다.

작업장 입구에 <정직이 기술이다>라는 사훈이 걸려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독학할 때 걸어놓았다. 걱정 근심이 정말 많았다. 불안한 마음이 들면, ‘기술과 잔재주로 만들지 말고 정직하게 만들자 반드시 알아줄 거다’라며 나를 달랬다. 지금도 늘 바라보며 일한다. 제품에 신뢰가 떨어지면 문을 닫을 각오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천안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이순구 선생의 후손으로 알고 있다. 

이순구 선생은 외증조부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아버님이시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당시 22살이셨다. 외할머니는 세 자매 중 막낸데, 자매들 모두 옥고를 치르고 탄압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 살며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고향을 떠나 멀리 시집와서 광복 무렵에 어머니를 낳으셨다. 외증조부님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다 지난 1986년에야 인정받으셨다. 문 대통령 취임 후에는 어머니가 연금과 의료비 지원을 받게 됐다. 참 고마운 일이다.

소양동 독거 이웃과 광복회 기부 등 다양한 기부를 이어오고 있다.       사진 제공=‘깨 볶는 오후’

앞으로 목표가 궁금하다. 그리고 지역 농가와 제조업체에 대해서도 조언해달라.

향후 2년에 이루고픈 목표가 있다. 현재 화천에 있는 밭에서 기른 깨를 재료로 이곳에서 제품을 만드는데, 조만간 HACCP식품제조 시설을 갖춘 공장을 지으려고 한다. 이를 통해 농사·가공·유통·판매를 아우르는 6차 산업(농업이 1차산업의 틀에서 벗어나 2차 가공산업과 3차 서비스산업과 융합하여 세 가지 산업을 아우르는 종합산업으로 확장된 개념으로서 ‘농촌융·복합산업’으로도 불린다)을 확립할 거다. 이후 홈쇼핑에도 진출해서 ‘깨 볶는 오후’를 기업으로 우뚝 세우고 싶다.

지역 농가와 제조업체가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문화와 관광 등 춘천의 자원과 효과적으로 연계해야 한다. 삼천동 시립청소년도서관 인근에 들어서는 ‘춘천 지역먹거리 직매장’에 기대가 크다. 관광객 할인과 포인트, 맞춤형 꾸러미도 도입해서 관광객이 꼭 들러서 뭐 하나라도 사 가게 해야 한다. 그곳에서 춘천의 문화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지역농가와 제조업체들을 위한 교육의 장이자, 정책담당자와 농업인, 제조업자가 자주 만나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는 사랑방으로 가꿔가야 한다.

인터뷰 진행 중, 한 어르신이 깨가 가득 담긴 꾸러미를 들고 왔다. 기름을 짜달라는 거다. 단골인지 특별한 당부의 말도 없이 새해 안부만 나누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대수롭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시장에서 작은 물건 하나 고를 때도 알뜰하게 살피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성정을 생각하면 서로 간에 신뢰가 꽤 크게 쌓인 반증이리라. ‘신뢰가 떨어지면 문을 닫을 거’라는 서대표.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박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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