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진 페이퍼 아티스트

오랜만에 내린 함박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던 날, 복합문화공간 ‘파피루스’ 테라스에는 거대한 붉은 장미가 눈을 맞으며 고고하게 피어났다. 

이토록 낯설고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 사람은 페이퍼 아티스트 김민진이다. 그는 ‘페이퍼 아트’ 중에서도 꽃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내는 ‘페이퍼 플라워’ 작가이다. 이상원미술관 ‘플라워공방’ 입주작가로서 시민 대상 체험 수업을 통해 아직 춘천에 덜 알려진 ‘페이퍼 플라워’를 알리고, 소양동에 자리한 작업실 ‘프롬제이(From J)’에서는 페이퍼 아티스트를 양성하고 있다.

‘파피루스’ 벽면에 설치된 작품 <나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와 김민진 작가

익숙하고 편안한 삶을 이어가며 한 분야에서 경력의 꽃을 피울 불혹의 나이, 하지만 그는 늦깎이 작가가 되어 생애 첫 전시회 <꽃이 핀다, 시들지 않는>을 열며 삶에 특별한 발자국 하나를 새기고 있다. 

춘천에서 나고 자라 가정을 일궈온 작가는 예술과 먼 삶을 살아왔다. 세무서 직원으로 또래보다 일찍 사회생활에 뛰어들었고, ㈜더존비즈온의 고객센터 직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자기계발을 통해 웹기획자로 변신, 업무능력을 인정받으며 파트장까지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번아웃이 찾아왔다. 그러면서 어릴 적 꿈이 간절히 떠올랐다.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앞만 보고 달려왔어요. 웹기획자로서도 10여 년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에 파묻혀 살았죠. 지칠 때면 어릴 적 꿈인 플로리스트를 떠올렸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며 미루고 살았어요.” 일과 사람에 치이고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진 2020년, 퇴사를 결심했다. “번듯한 직장을 왜 그만두냐는 주위의 걱정과 회사의 만류가 컸지만 망설임 없었어요. 진심을 다해 후회나 미련 없이 모두 소진했거든요. 전혀 다른 일, 오랜 꿈에 뛰어들기에 두려움과 불안보다는 기대와 설렘이 더 컸죠. 고맙게도 큰아들은 ‘엄마도, 엄마가 행복한 일을 하면 좋겠어’, 남편은 ‘얼굴이 환해진 거 알아?’라며 응원했어요.”  

퇴사 후 잠시 숨을 돌리며 플로리스트 학원을 살피던 중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 장의 꽃 사진에 사로잡혔다. “생화가 아니라 페이퍼 플라워였어요. 순식간에 새로운 장르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그 작가의 공방에 달려가 제자가 됐죠.” 그렇게 시작한 배움, 2020년 초가을부터 매주 5일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오랜 갈증을 채워갔다. 

‘페이퍼 플라워’는 주름지, 습자지, 색지, 에바폼(EVA), PVC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생화를 실제처럼 구현해내거나 상상의 꽃을 창작한다. 재료와 모양에 구애받지 않아 다양한 작업이 가능하다. “생화를 알아야 더 잘만들 수 있기에 꽃잎의 결, 꽃술의 모양, 꽃잎의 패턴 등 생화 공부도 필요하고 디자인과 염색 등 늘 배우고 있습니다.”

천장에 설치된 작품 <단아하지만 화려하게> 

‘페이퍼 플라워’는 춘천에서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미 문화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고, 최근 한국에서도 카페 포토존, 웨딩홀, 인테리어, 디스플레이, 이벤트 행사부터 개인 선물까지 대도시와 젊은 소비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해 춘천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고자 작업실 겸 공방 ‘프롬제이’를 차렸다. “구하는 자에게 길이 열린다고 하지요. 작업실 운영을 위한 종잣돈이라도 마련하려고 이상원미술관 카페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갔다가 지원서를 본 관장님이 마침 체험공방 하나를 더 늘리려는데 그곳에 ‘플라워공방’을 열어달라고 제안했어요. 지난해 7월 공방을 시작했는데, 체험수업에 온 시민들이 종이접기 꽃으로 생각하며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점에 의아해했지만 이내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작업의 매력에 빠집니다. 꽃잎과 꽃 수술 등 만들고 붙이기까지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요. 섬세한 작업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고 체험을 통한 만족감도 커요. 시민을 만나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춘천에서 페이퍼 플라워를 활성화시키고 싶은 목표가 생겼어요. 개인적으로는 ‘자이언트플라워’ 작업에 관심이 많아서 춘천의 다양한 기관에 시민의 휴식처가 될 수 있는 공간구성도 제안하고 싶어요.”

‘페이퍼 플라워’는 만든이가 정직하게 드러나는 장르이다. 같은 도안으로 만들어도 만든이의 기분에 따라, 손의 힘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며 다른 꽃이 탄생한다. 만든이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며 작품이 주는 감정과 감동도 전혀 다르다. 한마디로 만든이의 겉으로 드러나는 스펙은 전혀 상관이 없다. 그의 작품들도 그의 지나온 삶과 열정을 닮아 매우 섬세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꿈을 향한 삶의 전환을 미루고 망설이는 이들에게 조언도 남겼다. “잘나지 않은 저도 해냈어요. 간절히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아주 작은 실천이라도 첫걸음을 떼면,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어요.” 이어서 “전환을 통해 세상에 대한 가치관도 변했어요. 특히 창작자로서 타인의 생각과 창작에 공감하고 폭넓게 이해하게 됐어요. 시민들이 예술가들의 노력과 작품의 가치를 더 폭넓게 받아들여 춘천에 더 다양하고 새로운 문화가 확산되길 바랍니다.” 첫 전시회는 2월 7일까지 ‘파피루스’에서 열린다. 또한 그는 오는 2월 춘천미술관이 해마다 주최하는 ‘문화도시, 미술을 탐하다’ 시즌5에 강사로 참여하여 시민들에게 ‘페이퍼 플라워’를 가르칠 예정이다. 수업 결과물은 전시회로 소개된다. 그가 춘천의 문화지형에 피워 낼 새로운 꽃들을 하루빨리 보고 싶다.

박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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