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 루리 글·그림/ 문학동네/ 2021

눈도 없는 겨울이 차갑게 깊어간다. 북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들은 1월을 일러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아리카라족)’이라 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을 들여다보며 내면을 응시하는 눈을 가졌던 그들의 삶을 새삼 느껴본다. 긴 겨울방학이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저녁,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가만가만 함께 소리 내어 읽어도 좋을 책, 《긴긴밤》이 한겨울 추위에 온기를 보내준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보이는 코끼리에게 살을 맞대며 걷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어 걷는 코끼리들의 아름다운 세계. 코끼리처럼 코가 자라지 않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라는 편견 없는 말 속에서 코뿔소 노든은 어엿한 코끼리로 살았다. 스스로 앞날을 선택해야 하는 때가 왔을 때 노든은 진정한 자신인 코뿔소가 되기 위해, 그들의 응원을 받으며 바깥세상으로 나선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야생의 들판으로, 동물원으로, 전쟁 속에서 동물원을 탈출하여 다시 길 위에 나설 때까지 노든의 곁에는 긴긴밤을 함께 해준 ‘엉뚱하지만 특별한 코뿔소’라고 불러준 아내와 동료 앙가부, 내일을 딛고 서게 해준 펭귄 치쿠가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흰바위코뿔소 노든과 버려진 알을 마지막 순간까지 품어낸 두 펭귄의 사랑으로 태어난 어린 펭귄, 모든 것이 서로 다른 두 존재는 ‘우리’가 되어 긴긴밤을 뚫고 나아간다. 기나긴 여정에 어린 눈물과 고통, 뜨거운 연대와 공존, 사랑의 힘은 책장을 덮고도 오래도록 먹먹한 따듯함이 되어 밀려온다. 파란 지평선을 찾아가며 나누는 이야기는 사뭇 뭉클한 숭고함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존엄은 어디에서 오는가? 

“다른 펭귄들이 나를 좋아해 줄까요? 노든처럼 나를 알아봐 줄까요?”

“물론이지.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나를 증명할 이름 따위 없어도 코가 자라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도와 위로를, 불완전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너는 너 자체로 충분하다는 응원과 용기를 읽게 된다. ‘나로 살아간다는 것’의 설렘과 두려움, 기쁨을 단순하지만 깊이 있게 말해주며,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의 곁에서 함께 했던, 나를 향한 모든 이의 긴긴밤을 떠올리게 한다.

《긴긴밤》은 몇 해 전 뉴스에 소개된 ‘지구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의 안타까운 죽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라고 한다. 작가는 “누군가의 시간이 멈춘다 해도 그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또 다른 삶과 길은 계속된다는 의미를 담았다”라고도 했다. 별처럼 반짝이던 코뿔소의 눈빛이 알을 깨고 나온 어린 펭귄의 첫 기억으로 새겨져 있기에, 함께 건넌 긴긴밤이 있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 펭귄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봐 준 눈빛이 있었기에 우리는 믿는다. 어린 펭귄이 자신의 푸른 바다로 당차게 뛰어들어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아낼 것임을. 

코로나19 상황이 이어지며 더욱 스산한 이 겨울, 서로에게 따듯한 곁이 되어주자. 지친 마음들을 다독이며, 보듬어주며 함께 걷는 곁이 되자. 다시 시작하는 호랑이의 해, 힘찬 포효가 우리의 영혼을 맑게 두드린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향해 더디어도 나란히 함께 걸을 때, 우리의 긴긴밤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내 뒤에서 걷지 말라, 나는 그대를 이끌고 싶지 않다. 내 앞에서 걷지 말라, 나는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다. 다만 내 옆에서 걸으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 유트족 금언

한명숙(봄내중 수석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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