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선언을 넘어 슬로시티 본질을 잘 살려야…

‘시민주권’과 ‘지속 가능한 도시’가 핵심 목표였던 민선 7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민선 7기 들어 춘천시는 많은 도시들을 선포했다. 선포된 도시들에 따라 춘천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호 ‘대학도시’에 이어 ‘슬로시티’ 대해 살펴보겠다. 편집자 주

선언적 구호가 아닌 운동이 돼야

《춘천사람들》에서 여러 번 다루기도 했던 슬로시티는 슬로푸드 운동에서 확대된 운동이다.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날드가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 문을 열자 지역 주민들이 지역 고유의 전통 음식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생긴 것이 슬로푸드 운동의 시작이다. 다국적 기업에 맞서 지역 고유의 전통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운동이 확산되자 음식을 넘어 도시 전체에 느림을 도입하고자 한 것이 슬로시티 운동이다. 

3대를 이어 대장간이라는 전통방식을 지켜온 강동대장간, 박경환 대표와 아들이 일하는 모습

여기서 말하는 ‘슬로(slow)’는 단순히 패스트(fast)의 반대가 아니라 ‘여유·균형·조화’로 요약할 수 있는 의미로, 획일적인 도시가 아니라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옛것과 새것의 조화를 위해 현대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을 지향한다. 

한국슬로시티본부에 따르면 슬로시티는 ‘도시의 전통문화와 산업, 자연환경, 지역 예술을 지키고자 지역민이 참여하는 지역공동체 운동이며, 지역 특산물 및 전통 음식 가치 재발견, 생산성 지상주의 탈피, 환경을 위협하는 대량소비와 무분별한 바쁜 생활 태도 배격,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다림 등의 철학을 실천하는 운동’이다. 

단순한 선언 또는 선포가 아니라 지역 주민과 함께 ‘슬로’의 의식 공유 및 전환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도시의 정책을 통해 실현해 나가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 운동인 것이다. 그렇기에 슬로시티 인정을 받기 위해선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 하며, 사전에 여러 차례 설명회를 통해 슬로시티의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춘천시는 2019년부터 국제슬로시티연맹 가입을 위해 설명회, 연구용역, 국내 실사 등의 노력으로 지난해 3월 정식 승인을 받고, 춘천을 슬로시티로 선포한 지 1년여 가까이 되어간다. 선포 당시 전통과 자연생태를 슬기롭게 잘 지키며 느림의 미학을 기본으로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과 진화를 추구해나가는 도시라는 슬로시티의 철학이 춘천시의 방향과 맞닿아 있다며 시 관계자는 “국제슬로시티로서 지역 고유 자원과 문화가 공존할 수 있도록 다각적으로 노력하겠다”고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슬로시티 선정 후 이렇다 할 변화 없어

춘천시는 슬로시티 심사 당시 김유정 문학촌과 그 주변에 조성한 실레마을길, 강동대장간, 옥산가, 하중도 생태공원 둘레길 등을 제시하며 국제슬로시티연맹 한국슬로시티본부의 실사를 준비했다. 지역의 예술인을 기리는 마을과 특산품을 제시하고, 환경적 요소 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실사 대상이었던 곳들은 현재 어떻게 유지되고 있으며, 슬로시티의 철학을 실현하고 있을까.

먼저 김유정 문학촌을 찾아가 봤다. 지역 출신 예술가를 기리며 형성된 마을로 슬로시티 선포에 발맞춰 좀 더 지역의 특색이 드러나고, 주민들의 참여나 관심이 깃든 모습을 기대했지만, 그저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다른 곳과 달리 서너 명의 관광객이 있는 정도였다. 서둘러 강동대장간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장간이니 뭔가 역동적이고, 전통을 지켜가는 장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을 기대했다. 대장간에 들어가니 마침 한 손님이 낫을 사고 있었다. 한창 작업 중이던 박경환 대표는 슬로시티 선포 후 변화된 것이 있냐는 질문에 “특별히 그런 것은 없다. 시에서 하는 일이니 좋은 마음으로 함께 했다. 대장간의 변화가 있다면 지난달부터 아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고 답했다. 아버지, 박대표, 그리고 아들까지 3대째 대장간을 운영하는 셈이다. 전통방식의 대장간을 이어가는 모습에서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었고, 슬로시티의 실사 장소에 걸맞게 여겨졌다. 이어서 옥산가를 찾아갔다.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은 춘천연옥을 지속해서 연구·개발해 자체 상표인 ‘옥산가’로 출시되는 다양한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고, 옥 동굴 및 옥 사우나를 체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안내 직원에게 춘천이 슬로시티 선포 후 변화된 것이 있냐고 묻자, 슬로시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김유정 문학촌 입구, 몇몇 관광객이 입장권을 사고 있다.

슬로시티 본질, 한 번 더 생각해야 

‘실사 대상인 장소들에서 슬로시티의 가치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가치가 없다고 할 순 없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 장소인 하중도 생태공원으로 향했다. 춘천대교를 지나자 ‘공사 중’이라는 표시가 먼저 보였다. 슬로시티 평가 기준이기도 한 에너지 및 환경 정책의 내용에 따라 공원을 가꾸나 싶었지만, 그것은 레고랜드 공사에 대한 안내였다. 이쯤 되자 머릿속에 선명한 문구가 떠올랐다. ‘맥도날드를 경계해 지역 전통 음식을 지키려 했던 운동이, 춘천에서는 유적지라는 지역 역사가 발견된 곳에 레고랜드가 지어지는 선포가 되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역 고유의 역사 유적지를 보존하고, 지키고자 하는 지역 주민들의 의견은 꾸준히 무시된 채 다국적 기업의 테마파크가 건설되는 슬로시티라니. 슬로시티의 본질을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할 때이다.

중도 유적과 자연환경 보존을 요구하며 레고랜드를 반대하는 현수막

슬로시티를 지향하는 시 정책들

물론 슬로시티의 가치를 드러내는 시 정책 역시 진행되고 있다. 슬로시티 가입을 위해선 7개 분야, 각 분야별 총 72개의 평가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7개 분야는 △에너지 및 환경 정책 △인프라 정책 △도시 삶의 질 정책 △농업·관광 및 전통예술 보호 정책 △방문객 환대·지역주민 마인드와 교육 △사회적 연대 △파트너십 등이 있다. 1)에너지 및 환경정책에는 12개의 소항목이 있는데 이중 ‘옥외 광고물 등으로 인한 시각공해 및 도로소음 감소’를 위해 얼마 전 옥외광고물들을 제한하고, 단속을 강화하는 방침을 발표하기도 했다. 2)인프라 정책에는 9개의 소항목이 있다. 이중 ‘자가용 이용 대안으로써의 생태 교통수단 계획’에 부합하는 자전거 도시와 관련된 정책들이 있다. 또한 ‘일반 가정 및 임산부를 위한 계획’에 부합하는 육아수당을 확대 지급하는 등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 3)도시 삶의 질 정책에는 17개 소항목이 있고, 이중 ‘지역 생산품 판매 공간 마련’은 이미 춘천뿐 아니라 많은 도시에서도 시행하고 있다. 4)농업·관광 및 전통예술 보호 정책의 10개 소항목 중 ‘공공시설(학교 구내식당 등)에서의 지역 식자재 사용’은 여러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시행 중이다. 5)방문객 환대·지역 마인드와 교육은 10개의 소항목으로 주로 슬로시티의 가치를 지역주민들에게 체계적으로 알리고, 교육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이렇다 할 관련 정책을 찾을 수 없었다. 6)사회적 연대는 11개 소항목으로 소외계층, 다문화 거주민, 장애인 차별금지 등 다양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들을 살핀다. 시에서 하는 많은 복지 정책들이 해당 된다. 7)파트너십은 3개 소항목으로 슬로시티 관련 캠페인, 슬로푸드·전통음식 장려, 관련 철학을 실천하는 다른 국가와의 협력 등이 있다. 지면관계상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슬로시티 선포 이전부터 이미 시행했거나 이후 시행된 정책들 중 평가 기준에 부합하는 다양한 정책들이 있다. 

지역 주민과 함께해야 의미 있어

슬로시티로 지정된 도시는 32개국 281개(2022년 1월 기준)가 있다. 해외 슬로시티는 어떤 모습일까.

아프리카 슬로시티인 남아공의 세즈필드는 매년 부활절에 슬로 페스티벌을 개최하는데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해 슬로타운을 즐길 수 있다. 또한 이 지역 주민들은 ‘우리의 서약’이라는 것을 내세워 건강한 라이프스타일로 살고, 고령자를 살피고, 전통요리를 보존하고, 공동체가 함께 의사결정을 하는 등의 인식을 공유하고자 노력한다. 

터기의 슬로시티인 세페리히사르는 슬로시티가 되기 전엔 다른 지역에 비해 뒤처지고, 불이익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지역 주민들이 슬로시티가 된 후 오히려 옛 모습을 간직한 지역 고유의 특성을 지켜 방문자들에게 지역의 역사, 음식, 예술 등을 알리고, 친환경 에너지 등이 주요 컨셉이 되면서 슬로시티의 가치로 도시의 발전을 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슬로시티 엔스는 ‘삶을 되돌아보는 엔스에서의 시간’이라는 가치를 내세워 쾌적한 교통망과 풍부한 문화 인프라 등으로 살기 좋은 곳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 예산과 사업을 집행하고, 즐거운 인생을 목표로 하는 주민을 위해 다양한 기반시설을 마련했다. 어린아이를 위한 보육시설, 청소년을 위한 택시, 독거노인을 위한 의료서비스 등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다양한 복지정책을 통해 실현하고 있다. 

특히, 슬로시티 운동의 발원지기도 한 이탈리아의 그레베 인 끼안티는 작은 소도시로 살아남기 위해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인간과 자연환경의 속도를 존중하는 삶이 유지되는 슬로시티를 주창하였다. 당시 이 운동을 시작했던 시장은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는 한편, 모든 정책과 행정을 슬로시티에 맞춰 외부 자본의 대형 슈퍼마켓 유입을 막고, 외부인의 부동산 소유를 제한했다. 지역 주민들의 불편하다는 반발도 있었다. 하지만 끈질긴 설득,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정책으로 오히려 관광객들이 늘면서 지역 경제가 살아났고, 전통과 자연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확대됐다. 관광적 요소는 부차적으로 발생한 효과이고, 핵심은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소도시만의 철학이 담긴 구체적 정책의 실현과 지역 주민의 인식 전환이었다.

슬로시티는 단순히 명소들의 나열, 평가 기준에 부합하는 몇 개의 정책, 누군가의 선포만이 전부가 아니다. 한 도시가 그 지역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고, 지역 주민들이 함께 공유하는 가치를 담아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드는 운동인 것이다. 그 가치는 기계보단 환경의 속도에 맞추고, 지역 외부로 빠져나가는 자본보단 지역 주민들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정책과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향인 것이다. 

춘천의 슬로시티로의 전환은 이제 시작이다. 다국적 기업을 유치하는 것을 넘어 지역 경제와 전통을 살리는 온고지신 정신의 슬로시티 본질을 잘 살린 운동이 춘천에서도 활발히 펼쳐지길 기대해본다.

유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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