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욱(작가, 춘천문인협회 회원)

내 생애에서 1983년만큼 바쁜 해도 없을 것이다. 

그해 3월에 《춘고 60년사》 집필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춘성고(현 한샘고)에서 춘천고로 전근 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년 지난 9월에는 늦장가까지 갔다. 만 33세에 한 결혼이니 요즘으로 치면 별로 늦은 게 아니지만 당시에는 무척 늦은 편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처가에서는 내가 재혼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어 호적등본까지 떼어 봤단다.

바쁜 와중에 학교에서 교지 편집 지도까지 떠맡겼으니!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한창 젊은, 일할 나이였기 때문일 게다. 

교지 편집위원들(학생들)과 상견례를 한 며칠 뒤, 동료교사가 내게 귀띔했다.

“편집위원들 중에 이무상 시인의 아들이 있어. 참고하라고.”

그 얘기를 듣고 어떤 학생인가 찾아보니 키 크고 훤칠하게 잘생긴 ‘이돈영’ 학생이었다. 나는 이돈영 학생을 따로 불러 부탁했다.

“아버님이 시인이시지? 바쁘시겠지만 우리 교지의 앞부분에 실을 권두시 한 편 좀 써 달라고 말씀 드려라.”

그렇게 춘고 교지 《소양강》에 이무상 시인의 권두시가 실렸다. 교지 편집 지도교사로서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전하나 망설이는 중에 과분하게도 시집 한 권을 보내주시기까지 했다. 주황빛 바탕에 검은 글씨로 《사초하던 날》이라 표지 제목을 단 시집이었다. 

내가 너무 바쁜 탓일 게다. 교지의 권두시와 얼마 후 첫 시집까지, 과분한 호의에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린 채… 33년이 지난 2016년 7월이다. 

선배작가 박계순 씨의 장편소설《수》 출판기념회 자리에 초대받아 갔다가 이무상 시인을 처음 뵌 것이다. 어언 춘천 시단(詩壇)의 원로이지만 젊은 시인 못지않게 술자리를 흥겹게 만드는 이 시인.

2차로 들른 ‘봉의산 가는 길’ 카페에서 전설의 ‘꼽추 춤’을 덩실덩실 추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주 흥겨운 술자리에서나 보인다는 꼽추 춤이라 나로서는 그 현장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춤을 끝낸 뒤 한 잔 술로 목을 축이는 이 시인한테 나는 이렇게 내 자신을 소개했다. 

“아주 오래전에, 춘천고에 있을 때 교지 편집을 지도했었는데 그때 아드님인 이돈영 학생이 편집위원이었습니다. 아드님은 아주 헌칠하게 잘 생겼지요.”

그렇게 말해놓고는 아차 싶었다. ‘아드님은 잘생겼다’고 했으니 아버지는 그렇지 못하다는 뜻처럼 되고 만 것이다. 우리말 조사(助詞) ‘은/는’의 대단한 구별이라니! 

이미 한 말을 거둬들일 수도 없어서 나는 뒤늦게 수습하느라 진땀깨나 흘렸다.


이무상 

《사초하던 날》, 《어느 하늘별을 닦으면》, 《봉의산 구름》, 《향교골 시첩》, 《끝나지 않는 여름》 《하늘의 로또》등 6권의 시집과 춘천의 지명유래를 통해 역사를 찾아가는 《우리의 소슬뫼를 찾아서》등  5권의 저서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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