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s story] 어머니의 절대적 환대의 공간, 그 너머
[She's story] 어머니의 절대적 환대의 공간, 그 너머
  • 탁운순 (강원이주여성상담소장)
  • 승인 2022.03.0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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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운순 (강원이주여성상담소장)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집이 파산했다. 집에 빨간 딱지가 붙자 아버지는 한동안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좁은 집 구석구석을 방으로 만들어 세를 놓았고 안방과 다락을 제외 한 모든 방에는 각각의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마당에는 단 하나의 수도와 단 하나의 화장실이 있었다. 열 가구가 넘는 사람들은 매일 같이 화장실 앞에서 줄을 섰고 수돗가에서 함께 양치질을 했다.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수도요금과 전기요금을 나누었는데 대부분 사람 머릿수 대로 요금을 나누었지만, 단 하나 머릿수를 비껴가는 공공요금이 존재했다. 영희네 아빠가 다리를 다쳐 일을 못 나가는 며칠, 혼자 살며 밤에 어디론가 일을 나가던 김양언니가 술병이 나서 일을 쉬는 며칠을 어머니는 머릿수에서 감하여 계산했다. 가끔은 어머니의 계산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분란이 있었지만 “인간들이 그렇게 맘보를 쓰면 우리 집에 못 산다”로 어머니는 나름의 공평을 실현시켰다. 

우리 집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세를 살았다. 밤마다 어디론가 일을 나가고 낮에는 주로 잠을 자던 김양 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명절마다 언니를 불러 따로 음식을 챙겨주며 “고향이나 내려가지”라며 혀를 찼다. 아기를 데리고 혼자 살던 숙이네도 있었다. 가끔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들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숙이네 부엌에서는 기름 냄새가 났다. 딸을 미국에 시집보내고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던 청주댁도 있었다. 미국으로 시집간 딸 덕분에 청주댁은 몇 년 후 빨간 기와집을 짓고 우리 집을 나갔다. 청주댁 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를 한다는 소문이 돌 즈음, 미국으로 시집간 딸이 이혼하고 돌아왔다. 병을 얻었다고 했다. 딸이 병치레를 하느라 기와집을 팔았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밤에 일을 나가는 김양 언니가 하나뿐인 당신 딸과 밥을 먹고 사적인 친밀 관계를 형성해도 어머니는 문제 삼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이 나쁜 물 든다고 내보내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쁜 물 좋은 물이 어디있노, 다 편 가르기지, 갸도 그 집 어메에게는 귀한 딸이다”라는 말로 일축했다. 한 번은 숙이네 집에서 자고 가던 양복 아저씨의 본처가 찾아와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이때도 어머니는 숙이네 화장대를 부수는 본처에게 “네 남편이 문제지 애먼 사람 잡지 마라, 같은 여자끼리 갸도 불쌍타”라고 소리쳤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함께 살았던 그 시기 우리 집에는 정확하게 각자의 위치에서 그 절대적 환대가 인정되었다.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 차별되거나 배제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이웃 사람들의 근거 없는 소문에도 안전한 공간이 바로 어머니가 만든 우리 집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외국인 거주자가 2백만이 넘는 이민자의 나라이지만 결혼 이민자의 차별 경험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자료에 따르면 남편의 폭력 때문에 숨진 결혼이주여성은 2007년 이후 현재까지 21명에 이르고, 전년도 강원이주여성상담소의 상담 건수는 2천900건이 넘는다. 대부분이 이주여성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다.   

타자에 대한 환대의 정의로 ‘코넬리우스 플랜틴가’는 “우리 안에 머물 공간을 내어주고 그 안에서 꽃피도록(flourish) 하는 것”이라고 했고, 김현경은 “환대란 그 사회에 들어가 사람이 된다는 것으로 그 사회에 성원권(자리)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새삼, 과거 어머니가 내주던 타자를 향한 절대적 성원권, 그 환대의 공간이 그리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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