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3월 대선, 6월 지선이 동시에 치러지는 선거의 해이다. 선거가 유권자의 선택을 통해 당선자를 내는 것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경쟁일 수 밖에 없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어쩌면 삶 자체가 경쟁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스포츠를 선의의 경쟁이라고 부르지만, 승자를 가리는 경쟁에 선의가 개입할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스포츠 중계에서 흔히 전쟁 용어가 사용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관전평이란 말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관전 포인트라는 말은 언론의 선거 보도에도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건 역설적으로 선거가 전쟁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All or Nothing. 양자택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모 아니면 도’라는 게 훨씬 와 닿는 번역이다. 대부분의 선거가 1등을 당선자로 내다보니, 유권자, 후보자, 정당 모두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하고 선거를 치른다. 그러니 민주주의의 꽃이니 하는 아름다운 비유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전쟁처럼 치르는 게 현실이다. 

한 사회학자가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고 규정한 이래, 한때 사회를 ○○사회라고 명명하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다. 거기에 보탠다면 오늘날 한국사회는 ‘혐오사회’라고 할 만하다. 물론 이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혐오사회》, 《증오의 기술》이라는 책이 등장할 정도이다. 다른 국가에 대한 혐오에서부터 성별, 인종, 지역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극혐문화’가 폭을 넓혀가고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이제 싫어하는 혐오를 넘어서 미워하는 ‘증오사회’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흔히 악한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피하는 것이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상대할 가치가 없기 때문일 때 쓰는 표현이다. 어쨌든 피한다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고, 그것은 혐오의 감정이다. 증오는 그 단계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상대를 파괴하고자 하는 감정이다. 혐오나 증오가 사회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으면 공동체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혐오의 바탕을 이루는 두 영역은 정치와 언론이다. 정치혐오와 언론혐오는 모두 신뢰를 거둬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혐오는 현 정부에 의해 임명되었던 검찰총장이 반대 진영의 대선후보로 등장해 정권교체를 주장하면서 극점을 향해 다다르는 중이다. 정책과 미래 비전의 공약으로 평가받아야 할 선거가 말잔치뿐이다. 당연히 그 말은 혐오와 분노의 감정을 부추기는 증오의 언술이다. 적폐청산이라는 말의 근저에는 정치보복이 깔려 있다. 정치가 후진적이라는 평가는 그래서 나오는 말이다. 

정치혐오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언론혐오는 최근의 현상인 듯하다. 민주주의는 공동체 구성원이 만들어 가는 공론의 장이기에,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론혐오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뉴스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다. 결국 소비자인 시민이 언론이 생산해 내는 상품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정치인과 언론인의 반성은 없다. 

복수설치(復讎雪恥)하면 통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증오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 뒤에 무엇이 남을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선거를 전쟁처럼 치르더라도 그것은 성전(聖戰)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로지 유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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