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호 한국메밀연구소 소장

막국수는 춘천을 대표하는 먹거리이자 상징이다. 

사람들은 막국수 원료인 메밀에서 강원도를 떠올리며, 평창의 ‘봉평 메밀꽃 축제’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지역 축제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덕분이다. 문학 그리고 문화의 힘이다. 강원도에서 메밀의 문화사적 역사성과 향토성은, 지역민의 삶의 원형과 맞닿은 고유한 스토리이며 로컬산업의 핵심소재이다.

하지만 강원도는 이제 메밀의 주산지가 아니다. 제주도가 30%를 넘게 차지하는 최대 생산지이고 다음으로는 전라도다. 강원도의 생산량은 10% 정도이다. 이에 지역의 한 인물은 “스토리가 콘텐츠에 날개를 달아 주는 시대에, 있는 스토리 조차 제대로 살리지 못해서 지역의 향토산업이 경쟁력을 잃어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쓴소리를 전한다. 

바로 박철호 한국메밀연구소 소장(66·전 세계메밀학회장·강원대 의생명과학대 명예교수)이다. 그는 메밀 관련 논문만 50여 편에 달하는 ‘메밀 박사’로서 지역에서 메밀 관련 연구와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30년 넘게 노력해 왔다. 또 꾸준히 문학작품을 펴내고 있는 작가이며 강원대 의생명과학대 정년퇴임 후에는 유튜브 채널 <박철호 메밀TV>를 통해 메밀 사랑을 이어가는 ‘메밀 크리에이터’이다. 

과학도, 현대판 《상록수》를 꿈꾸다

영월에서 태어난 박 소장은 초·중학교를 영월에서 다닌 후 춘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심훈의 《상록수》에 감명을 받아 사범대에 진학하여 시골 학교의 국어교사가 되는 꿈을 가졌다. 하지만 고3 진로선택을 앞두고 결심이 바뀌었다. “현대판 《상록수》를 꿈꿨죠. 어느 날 《경향신문》 지역 소식에 강원대 농학과 연구원들의 활동 내용과 육종 사진 등이 실렸었는데, 그걸 보고 마음이 흔들렸어요. 당시 오일쇼크, 식량안보 등이 큰 이슈였거든요. 그래서 시골 학교 교사를 하더라도 농업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농촌을 변화시키자는 결심이 생겼습니다.” 바람대로 1974년 강원대 농학과에 입학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춘천농업대학교가 전신인 만큼 당시 강원대 농학과는 한국에서 농업 관련 연구의 선두에 있었다. 

그런데 대학 2학년 때 더 큰 꿈이 생겼다. “배추 연구 권위자인 유근창 교수(강원대·큐슈대)님께 배웠는데, 그분은 제자양성뿐 아니라 농업 기업에 기술을 전수하셨어요. 한국 농촌의 발전은 기술에 있음을, 현대판 《상록수》는 과학자가 되어 기술발전에 기여하거나, 농업 분야 관료가 되어 정책으로 뒷받침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농업 과학자가 되기로 궤도를 수정했습니다.”

ROTC 장교로 병역을 마치고 돌아와 1982년 8월 벼를 주제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어서 옥수수 종자 연구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꿈을 향한 도약의 시점에 두 갈래 선택의 길이 나타났다. 강원도와 자매결연을 한 캐나다 앨버타 주정부 장학생의 기회와 메밀 연구가 활성화된 일본 미야자키대학 박사과정 장학생의 기회였다. 고민 끝에 더 큰 세상에서 공부를 하고파 1984년 캐나다로 떠났다. 이후 국제학술지에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좋은 성과를 내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90년 8월 강원대 교수로 부임하자 오랜 꿈인 메밀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대학원 시절 막국수 애호가였던 교수를 따라다니며 막국수의 참맛을 알게 됐어요. 당시 강원도는 품질 좋은 메밀이 많이 생산됐고 메밀 식문화도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기에 강원도에서 누군가는 메밀을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해보자’ 결심했었죠. 당초 계획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정말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메밀 산업발전 위해 동분서주

박 소장은 메밀연구와 더불어 강원도의 메밀 산업발전을 위해서는, 3년에 한 번 열리는 세계메밀학회를 춘천에 유치시켜야 한다고 결심했다. 강원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1996년에 ‘한국 메밀연구회’ 창립, 잡지 《메밀》 창간 등 세계메밀학회 춘천 유치의 당위성을 널리 설파했다. 제7회 대회가 열리는 캐나다에서 투표를 통해 호주와 우크라이나를 제치고 2001년 제8회 세계메밀학회를 춘천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박철호 메밀 TV에 78개의 콘텐츠가 올라와 있다. 

그는 제8회 세계메밀학회 일정을 춘천 막국수축제와 평창 효석문화제와 겹치게 조정하여, 학회 관계자들이 막국수와 메밀 축제를 가까이서 경험하고 즐기게 했다. ‘세계메밀학회 식품전시회’, ‘춘천막국수 발전 방향 포럼’ 등 글로벌과 로컬, 농업과학과 문화를 잘 조화시켜 큰 호평을 받았다. 세계메밀학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며 한국 메밀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박 소장은 그러한 성과를 토대로 같은 해 세계메밀학회 회장이 됐다. 

찬란했던 시절을 들려주던 박 소장의 목소리에서 이내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30년 동안 메밀연구와 산업발전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크게 호응을 얻지는 못한 것 같아요. ‘한국 메밀연구회’가 활발하게 활동할 당시, 춘천 막국수의 명품화와 세계화를 위해 농림부의 향토산업 육성사업 지원을 받고자 ‘춘천 막국수협의회’ 등과 협업해 사업계획서를 작성했지만, 춘천시의 결재를 받지 못해 지원하지 못한 적도 있어요. 또 메밀과학과 인문, 문화를 아우르는 종합교양지 《메밀》도 지원 부족으로 2004년 11호 만에 폐간됐습니다. 계속 발행됐다면 지역의 얼마나 크고 소중한 자산이겠어요?”

‘한국 메밀연구회’는 2006년 문을 연 ‘막국수체험 박물관’에 각종 자료를 제공하는 등 메밀 산업발전을 위한 공감과 호응을 이끌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현재는 사실상 명맥이 끊어졌고 박 소장의 수많은 제안도 허공으로 사라져갔다. 

문학으로 이어가는 꿈 

2018년 정년퇴임이 코앞에 다가오자, 메밀과 춘천막국수 발전을 위해 이루지 못한 일들이 큰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 꿈을 소설로 이어가리라 결심했어요. 소설을 통해 메밀과 지역 자원에 관심이 있는 시민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죠.” 2018년 첫 단편집 《산토 치엘로》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해마다 소설책을 펴내고 있다. 장편소설 《춘천여자, 송혜란》은 춘천 출신 여성이 유학에서 돌아와 메밀 특산품을 개발하여 수출에 성공하는 이야기로서 한 인간의 성장과 향토산업을 잘 엮어냈다. 또 장편소설 《막국수 연가》는 이방인이 춘천에서 막국수 식당을 창업하여 성공하는 이야기다.

박 소장이 펴낸 문학작품 중 일부

지난해 연말에는 단편 소설집 《감희원(感喜園)》과 창작동화집 《하늘을 나는 메밀꽃》을 펴냈다. 전자에는 메밀꽃을 아끼는 노인의 모습이 애틋하게 담겨 있으며, 후자에는 고향 영월의 ‘메밀꽃’과 ‘다슬기’를 의인화하여 아이들에게 메밀의 생태와 자연의 소중함 그리고 어른들에게는 향토자원의 가치를 일깨워 준다. 모든 작품 속 주요인물들에 박 소장의 자아가 투영됐다. 소설뿐만 아니라 교양 도서 《춘천막국수》를 통해서는 춘천막국수의 역사, 영양과 효능, 식문화, 산업 등 전반을 소개하고 글로벌 가치를 담은 향토산업의 미래를 조망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장르의 글을 통해 메밀의 가치를 널리 전파해왔다.

글로벌 메밀 플랫폼, <박철호 메밀TV> 

그는 지난해 강원대 의생명과학대 정년퇴임 후 팔호광장 인근에 ‘한국 메밀연구소’를 열고 아카이빙과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오랜 시간 교류해온 세계메밀학회의 창시자 이반 크레프트(슬로베니아) 교수와의 우정을 기념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박 소장이 연구소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유튜브 채널 <박철호 메밀 TV>의 운영이다. 메밀에 관한 과학, 식문화, 문학을 종합적으로 다룬 영상을 일주일에 하나씩 업로드하며 메밀을 알리고 있다. 폐간된 종합교양지 《메밀》의 영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2021년 9월 첫 영상을 올리고 지금까지 78개의 콘텐츠를 업로드했어요. 늘 새로운 정보와 논문을 찾아 공부합니다. 전문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일반 독자들도 메밀에 흥미가 생길 수 있도록 영상을 쉽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강단과 연구소에 있을 때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해요. 메밀에 관한 모든 것이 담긴 글로벌 플랫폼이 목표입니다. 아마 세계최초일 거예요. 해외 여러 나라에 우리 메밀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번역 등 보완할 것도 많아요. 메밀에 관한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이 이 채널에 찾아와 하나라도 배워가서 의미 있게 활용한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강원대 의생명과학대 명예교수로서 여전히 강단에 선다. ‘생물통계학’을 가르치는데, 오랜만에 학생들을 마주하는 강의가 예정되어 있어 기대감을 전했다. “청년들에게 우리 향토자원의 가치도 알리고 싶어요. 메밀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식문화와 원형보존도 의미 있지만, 그와 더불어 창의적으로 맛과 품질을 개발해서 현대인의 기호에 맞게 발전시켜야 합니다. 보이는 축제도 중요하지만, 산업의 토대인 자원에도 집중해서 다양하게 발전시켜야 합니다. 2001년 제8회 세계메밀학회 때 춘천에서 선보인, 옥수수 강냉이 메밀 버전인 ‘메밀튀밥’의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하지만 소리 없이 사라졌죠. 그런데 당시 독일인 참석자가 유럽에 가져갔는데 이후 유럽 일부 나라에서는 즐겨 먹는 건강 간식이 됐습니다. 우리도 아직 늦지 않았어요. 지역의 메밀 관련 민·관·산·학 협력이 절실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구심점이 필요한데 대학에서 그걸 하고자 했으나 미완에 머물렀어요. 연구도 대가 끊길까 염려됩니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이곳에서 끝까지 해볼 겁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글로컬’, 최근 각 분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 중 하나이다. 인기를 얻은 로컬 제품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도 하고, 지역의 문화가 세계와 소통하는 시대이다. 바로 박 소장이 오랫동안 꿈꿔온 일이다. 그의 꿈을 응원하다.

박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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