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발이 절벽일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송곳> 대사 중

최규석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2015년 방영된 드라마 <송곳>의 대사다. 여전히 열악한 우리네 노동으로 인해 2013년 웹툰 연재 시작일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명작이다.

부당한 노동현실에서, 아주 평범하다 못해 시시한 인간들이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뚫고 나오는 <송곳>의 이야기가 춘천의 지역마트에도 있다. 벨몽드마트 노동조합 지회장, 이학수 씨(33)를 만나고 왔다. 생각보다 훨씬 젊었던 청년 노동자 이학수 씨는 근로시간면제 날임에도 물류창고에서 조합원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일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6년 정도 됐습니다.”

와, 그럼 20대에 입사하신 거네요. 어떻게 입사하게 되셨나요?

“속초가 고향인데 대학을 춘천으로 오게 되며 연고가 많아져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됐습니다. 졸업하고 어머니가 계신 속초에서 살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대학 선배가 벨몽드마트에서 사람 구한다며 같이 일해보자는 연락이 왔어요. 어머니가 걱정돼 고민이 많았는데 하필 그때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친구가 춘천에 있어서 한 2년만 일하며 그 친구한테 고백해볼까 싶은 마음에 춘천에 다시 오게 됐습니다. 그렇게 일하게 된 게 지금까지 오게 됐네요. 사람이 문제에요.” (웃음)

대학 선배의 “사람이 없으니 일 좀 같이하자!”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는 이학수 지회장의 사람관계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사람이 문제라면서 사실은 사랑이 문제였나 보다. 

그래서 짝사랑하던 분과는 어떻게 되셨나요?

“하늘이 도와 연애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웃음) 못했으면 다시 속초로 갔을지도 몰라요. 입사해서 일에 적응하느라 많이 힘들었어요.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입사 초반에는 직원이 부족해서 새벽 5시에 출근해서 밤 11시~12시에 퇴근하거나, 아침 9시에서 새벽 2시까지 일한 적도 있어요. 다행히 한두 달 정도 뒤에 인원이 충원돼 9시에서 오후 8시 정도에 퇴근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일했나 싶어요. 휴무도 격주로 2일 정도여서 쉬는 날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다행히 입사 후 몇 개월 뒤 짝사랑하던 친구와 연애를 하게 돼 더 버틸 수 있었습니다.” (웃음)

그렇게 우연과 필연이 모여 6년 가까이 일하고 있다는 이학수 지회장은 지금도 자신과 함께 해주는 연인에게 수줍게 고마움을 전했다. 청년 노동자의 싱그런 사랑 이야기에 함께 기분이 좋아지다가, 많지 않은 나이에 고된 노동을 버텨낸 단단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굉장히 힘드셨을 것 같은데,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드시게 된 걸까요?

“제가 만든 건 아니고, 4년 전쯤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만들었습니다. 제가 2대 지회장입니다. 당시 직원들이 근로조건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만들자고 모인 사람들끼리 ‘한 3년은 걸리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조합에 가입했어요. 처음에 3명이 모여 구상을 했고, 6~7명이 모여서 노조를 만들려고 한 지 두세 달 만에 전체 직원 90여 명 중의 60명이 순식간에 모여 노동조합을 설립했습니다. 가입 가능한 노동자들은 거의 다 가입한 거 같아요. 그만큼 회사에 대한 불만들이 많이 쌓여있었구나 싶었죠.”

생각보다 엄청 빨리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네요. 기분이 어떠셨어요?

“얼떨떨했어요. 정사원 중에 관리자 빼고는 대부분 조합원이 된 거예요. 다들 희망에 차서 좀 더 일하기 좋은 내 일터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들에 설렜었습니다. 노란 조끼를 맞춰 입고, 노동조합 설립 신고서를 본사 7층 이사에게 제출할 때는 그게 뭐라고 엄청 떨면서 갔어요. 묘한 해방감 같은 게 들기도 했고요.”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노동조합 설립에 대한 직원들의 뜨거운 호응을 보면서 신기할 따름이었다며 그때의 떨림을 전하는 이학수 지회장에게서 <송곳>의 이수인과 같은 무거움보다는 성격 좋고, 싹싹한 신선식품부 주임으로 나오는 주강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학수 지회장은 9시 출근 시간에 딱 맞춰 간다고 한다. 출근 시간보다 일찍 오는 걸 미덕으로 여겨, 공짜 노동을 강요하는 회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해서다. 이를 반기는 동료도 있고, 그래도 좀 일찍 오라며 핀잔을 주는 동료도 있다고 한다. 본인만이라도 눈치 안 보고 그렇게 행동해야 회사가 직원들을 우습게 보지 않을 거라며 씩씩하게 소신을 밝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이라도 일찍 나가게 되는 게 현실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노동조합 만들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뭘까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단체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이게 참….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단체협약을 통해 젤 먼저 바꾼 게 월급을 제때 주게 한 것입니다. 정해진 월급날이 10일인데 보통 주말이나 공휴일이 겹치면 전날 주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저희는 매번 그 후에 줬어요. 10일이 토요일이면 월요일 이후에나 월급이 들어왔어요. 월급으로 한 달을 생활하는 직장인들한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죠. ‘급여는 매월 10일로 한다. 공휴일이 있을 때는 그전에 지급한다’라는 아주 기본적인 사항조차도 회사는 난감해하며 들어주지 않으려고 했어요.”

 

임금인상, 직원 휴게실 신설, 여름휴가비·건강검진비, 유급 병가제도 등 놀라운 변화를 만든 노동조합 

조합원들한테 가장 호응이 좋았던 사업은 뭔가요?

“작년에 직원들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1위가 단연 임금인상이었습니다.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매년 임금협상을 통해 조금씩이라도 임금을 인상해오고 있습니다. 물론 쉽진 않지만요. 공동 2위로는 임금 지급일이 공휴일인 경우 전일 지급하는 것과 여름휴가비 신설이 호응이 좋았습니다. 2020년 임금협상을 통해 여름휴가비 20만 원 정도를 따냈거든요.”

이 밖에도 노동조합이 생긴 후 노동조합 사무실을 만들고, 조합원들의 교육시간을 확보하고, 직원휴게실을 신설하고, 건강검진비를 받아내고, 사내 근로복지기금을 도입하고, 아프면 쉴 수 있게 유급 병가제도를 도입하는 등 이전이라면 결코 없었을 많은 변화들이 생겼다.

정말 굉장한 변화를 만들었네요. 노동조합을 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특히 노동조합 설립 첫해에 조합원들이 함께 이러한 변화를 만들고, 기뻐하며 노동조합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들 느꼈던 것 같아요. 힘든 점이라고 하면…….”

힘든 점을 떠올리며 잠시 침묵하며 말을 아끼던 이학수 지회장은 어렵게 입을 뗐다. 

“사실 직원의 대부분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던 설립 초기와 달리 지금은 조합원이 많이 줄었습니다.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근무환경이 많이 개선됐는데 회사는 그게 좀 싫었던 모양이에요. 은근히 승진기회 이런 걸 들먹이면서 조합 탈퇴 등의 회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경우 외에도 워낙에 이직이 많은 업종이라 자연스레 감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면 힘드셨을 것 같은데, 지회장을 하기로 결심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글쎄…. 뭐 대단한 결심이라기보다 노동조합이 처음보다 어려워진 상황에서 외면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지회장이 되고 나서 미안해하며 조합을 탈퇴한 직원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힘이 빠지고, 속상하지만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회사의 은근한 압박도 무시할 수 없고, 평생직장으로 삼기엔 일이 고되다 보니…. 아쉽지만 혼자 쓴 소주 마시는 수밖에 없죠. 하지만 노동조합으로 나아진 점이 분명히 있고, 잘 되든 못 되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노동조합이 다시 잘 되도록 애쓰겠지만, 그렇게 안되더라도 마지막 한 명(본인)이 남을 때까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장담은 할 수 없지만요.” (웃음) 

벨몽드마트 노동조합 조합원들과 함께 마트노동자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집회에 참여한 모습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를 이야기하고, 내가 다니는 일터를 개선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게 이상하지 시대는 언제쯤 오는 걸까. <송곳>에서도비슷한 상황이 나오는데 이수인 역시 이학수 지회장과 비슷한 말을 한다. 

“탈퇴한 분들은 배신자가 아닙니다. 그분들은 우리와 함께 싸우다가 우리보다 먼저 쓰러진 것뿐입니다. 저는 부상당한 동료를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아직 노조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저보다는 여러분에게, 여러분보다는 한 달 치 월급 때문에 탈퇴한 사람들에게, 탈퇴자보다는 가입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입자격도 불확실한 계약직들에게 노조는 더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어렵더라도 조금 더 해보겠다는 이학수 지회장을 응원한다. 근로시간면제라고 사무실에 앉아만 있는 게 아니라 지역 내 벨몽드마트를 돌아다니며 직원들을 만나고, 일을 함께하는 게 지회장이라고 말하는 이학수 지회장은 인터뷰 당일에도 물류창고에서 직원들의 일을 돕고 있었다. 근로시간면제는 노동조합 활동을 위해 회사로부터 보장받는 시간이다. 

현재는 이학수의 인생에서 어느 지점인지, 앞으로의 인생 목표를 여쭤봐도 될까요? 

“하하, 제 인생에서 지금은 고민의 시기입니다. 잠잠한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달까. 아직 뭐 거창하게 인생의 목표를 생각해 보진 않았습니다. 그냥 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삶을 살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벨몽드마트는 4년 전 장학회를 만들어 지역에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한다. 이러한 좋은 일들을 정작 마트를 책임지며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들에게도 많이 하면 좋겠다는 이학수 지회장의 말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다음 한발이 절벽일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걸음 내딛고’ 있을 청년 노동자 이학수 지회장의 앞날을 기대해본다. 

유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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