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미 (춘천여성협동조합 마더센터 이사장)

대선 결과가 발표되고,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은 ‘멘탈 파손주의’ 상태로 오늘을 보듬고 살아가고 있다. 나 또한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결이 좀 다르다. 나는 그동안 총 5번의 대통령선거를 치르면서 한 번도 내가 뽑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적이 없다. 누군가는 엄청난 ‘절박함’으로 ‘벅차오름’으로 대선을 기억할 수 있겠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그럼에도 과거 민주화세대가 정권을 잡고 나서 그래도 더 평화롭지 않았냐고, 더 살만하지 않았냐고, 더 정의롭지 않았냐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 주변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20대에서 40대로 넘어오면서 수배 걱정을 안 하게 되었고, 경찰과의 몸싸움을 더 이상 안 해도 될 거 같다고 생각도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치열하게 노동의 현장에서 싸우는 이들이 존재하고, 사회적 약자의 자리는 늘 무시당하기 일쑤다. 정치인의 언어에는 대한민국 사회의 절박한 기후위기, 노동탄압, 젠더갈등 등의 이야기는 없어진 채 여·야의 공약들이 어쩐지 닮아 있을 때도 많다. 표를 의식해서인지 보수진영에서 진보진영까지 아우르는 저마다의 정책들이 진정성이 의심되기도 했고, 교묘하게 자기 입장을 숨기기도 하는 숨바꼭질 멘트도 많았다. 대선이 끝났고 지선이 다가온다. 우리는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이번에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낙심하고 있기에는 곧바로 다음 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이번의 과오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남 탓을 하기보다 우리의 전열을 어떻게 정비하고 다시 시작해야 할지 고민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절망스러울 때는 역시나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이다. 나와 같은 지향을 가진 ‘작은 씨앗’을 품고 있는 사람이 다섯 명, 열 명, 열다섯 명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면 가장 암흑의 시대라고 할지라도 정말 신나고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 지역운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활동가들만 덩그러니 남아서 온갖 일들을 해낸다면 그것만큼 건조하고 절망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세상의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단단한 뿌리’ 때문이다. 

20대에 작은도서관운동을 하면서 만난 20년 지기 선생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선미씨. 그때 (스물몇 살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우울해 보일 때도 있었는데, 그때에도 우리한테 카레를 만들어줬잖아요. 손수 요리를 해서 데코도 하고. 그때 기억이 나요. 그때처럼 뭔가 다시 시작해 봐요.” 아마도 몇 년 전, 어떤 사업을 같이 해보자고 이야기하시면서 20대의 나를 소환시켰던 단편적인 이야기였다. 아주 소소한 이야기지만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학생운동으로 집에서 쫓겨날 뻔하고 대학교는 제적당하고 그럼에도 시민운동을 하겠다고 꾸역꾸역 살아왔던 때에 지역여성회를 함께 만들었던 엄마들은 그렇게 내 삶을 보살펴주고, 가끔씩 찾아와 찡한 응원을 해주고 간다. 보너스가 나오면 말없이 마더센터에 와서 후원을 해주고, 내가 해준 것도 별로 없는데 늘 와서 고마웠다고 말해준다. 오늘의 하루는, 척박하고 불행한 하루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 내일을 함께 시작해보자고 이야기하는 단 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기에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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