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정 (시인)

선배, 말해봐요. 인생이 자기 예상대로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누가 예상대로 된다고 그랬어? 거봐요. 그러니까 미리 나쁜 예상을 해놓아야 한다구요. 그럼 예상대로는 안 될 테니까 나쁜 일도 없을 거 아녜요? 좋은 일이 올 거라고 기대하면 보통 정도의 일 갖고도 나쁘게 됐다고 비관적으로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치만 최악의 경우를 예상해 놓으면 언제나 그보다는 나은 일이 닥치게 되죠. 염세주의가 왜 필요한데요. 죽기밖에 더하겠어, 그런 말은 또 왜 나왔겠어요. 철학 좀 해요, 철학 좀! 감독님, 안 그래요? 

은희경 작가의 《비밀과 거짓말》에는 주인공인 영화감독 영준의 영화 #비밀과 거짓말 시퀀스가 삽입되어 있다. 당시 파격적이고 독특한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사뭇 무겁고 빽빽한 이야기에 숨통을 트이게 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 바나나. 밑도 끝도 없이 바나나로 명명한 이를 상상하면 주변에 한 명쯤 있을법한 인물이다. 바나나는 작가 주변의 누군가이거나 작가 자신을 그대로 투영한 것일지도. 상대가 기분 상할 수도 있는 말을 악의 없이 경쾌하게 내뱉는 캐릭터. 매력 있는. 그녀가 왜 바나나인지는 점을 보는 장면에서 우연히 발설되는데 바나나의 이름이 박난아였던 것. 싱겁긴 했지만 나름 재밌는 설정이었다. 어쨌든 미리 나쁜 예상을 해놓는 버릇... 거기 밑줄이 그어져 있다. 

그랬어요. 멀리 사는 엄마가 그리울 때마다 집으로 들어가는 동네 길목에서부터 생각하곤 했지요. 엄마는 오늘도 분명히 안 왔어, 대문을 열어도 엄마는 없다, 댓돌에 엄마 신발은 없어, 왔을 리 없다, 안 왔다. 내가 틀렸어도 엄마가 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과 안 왔어도 할 수 없다는 체념이 대문 앞에 차곡차곡 쌓여갔어요. 기다림을 완전히 포기했을 때 거짓말처럼 엄마가 오시더군요. 이별을 고하기 위해. 그 후로 내 선에서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목을 매는 짓은 잘 하지 않아요. 어렸지만 자존심이 더는 허락하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미리 나쁜 예상을 해놓는 버릇이 생긴 건 아마 그즈음인 것 같아요. 해서 붙을 것 같던 시험에 보기 좋게 떨어졌어도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어요. 인생의 대문이 거기만 열려있는 것도 아니고 안 열리면 또 다른 문을 찾으면 되니까. 시도 그래요. 갈망할수록 멀어지고 놓아두면 저절로 다가오는, 마치 떠났어도 떠난 게 아닌 세상의 모든 엄마들같이 말예요. 시 쓰는 선배들이 참 멋졌어요, 당장 학사경고를 받고 노가다를 뛰러 다녀도, 낡은 외투를 걸친 겉늙은이가 되어가도(아, 그때 우리는 얼마나 탱글탱글한 젊은이였던가요) 선배들은 그저 높아만 보였지요. 선배는 우리가 짓까불어도 허허 웃어주고 엉터리 시를 써와도 어깨를 토닥여 주시던 걸 기억해요. 그러니 실망은 여기까지. 놓는다는 말씀 마세요. 상투적인 것, 진부한 것과의 싸움, 새로운 작품세계에 대한 열망을 알아요. 우리가 알아요, 선배. 

선배님, 내 얘기 들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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