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환 (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 지원관)

며칠 전 가끔 방문하는 커뮤니티 사이트에 “정 없어진 한국 사회”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글을 보았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1990년대 한국을 찾은 외국인이 한국에서 경험한 따뜻함, 선의, 한국인의 ‘정’은 그 자체로 신선했고 한국이 좋은 나라임을 알려준 좋은 경험이었지만 요즘엔 그러한 ‘정’을 경험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이 게시물에는 꽤 많은 댓글이 달렸고 그 댓글을 차근차근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삭막해진 한국 사회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이 글들을 보며, 《팔꿈치 사회》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여기서 팔꿈치는 반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이들보다 앞서기 위해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며 달려가는 치열한 경쟁 사회를 상징합니다. 상생과 협력의 가치는 배제되고 경쟁과 승자독식 문화가 중요한 가치로 대두되어 타인을 경쟁상대이자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당시 사회를 ‘위험사회’라 규정했습니다. 울리히 벡에게 위험사회란 원자력 노출, 환경오염, 실업과 같은 문제와 사회의 발전을 통해 나타난 빈곤, 불평등과 같은 문제들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울리히 벡은 이런 위험사회가 모든 국가와 사회 계급에 영향을 미치고, 개인을 넘어 전 지구적 차원의 결과를 발생시키는 위험이며, 이 위험은 분명히 인지(식)되지도 않고, 개인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 없는 사회”, “팔꿈치 사회”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개인적으로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위험의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덧 우리는 위험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울리히 벡은 이런 위험사회의 해법으로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의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국가 사회’를 기본적인 분석단위로 삼는 기존 이론의 틀을 벗어나 세계시민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할 때에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세계시민은 개인 내면의 변화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단서를 덧붙입니다. 정리해보면, 위험사회의 대안은 내면이 변화된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춘천시민학교에는 ‘쉼표학교’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1박 2일 동안 ‘쉼’이라는 주제로 진행됩니다. 작년 9월 처음 ‘쉼표학교’에 참가했습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시민들이 둘러앉아 지금 자기의 감정을 날씨로 표현해보는 시간으로 쉼표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곳의 자기소개는 다른 곳과 달랐습니다. 나이와 이름 신분(직책)이 아니라 별칭으로, 그 별칭을 지은 이유와 함께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1박 2일 동안 나의 이름은 내가 지은 별칭이 됩니다. 

쉼표학교에는 휘게(Hygge,쉼) 시간이 많이 있습니다. 덴마크어인 휘게는 편안함, 따뜻함, 아늑함을 의미합니다. 가족이나 친구와 소소하게 보내는 시간을 뜻하기도 하고,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함에서 발견하는 행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둥글게 둘러앉아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이나 함께 식사하는 시간도 휘게라고 합니다. 1박 2일 동안 프로그램 사이사이에는 휘게 시간이 계속 배치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홀로 나를 위해 보내는 시간이었던 휘게의 시간이 어느 순간에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함께하는 시간으로 변합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함께 쉬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통해 어제 처음 만난 이름도, 직업도, 나이도 모르는 옆 사람과 금방 친구가 됩니다. 쉼표학교 친구들은 어느새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재능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함께 게임을 하기도 하고, 함께 춤을 추기도 합니다. 

울리히 벡의 글을 보면서, 왜 개인 내면의 변화가 세계시민주의까지 연결되는지 의아했습니다. 그 의문은 춘천시민학교에서 만난 시민들 덕분에 일정 부분 해소되었습니다. 자기의 쉼을 찾는 개인이 다른 이들과 연결되고, 그 연결과 만남이 또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확장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연결과 확장을 춘천시민주의라 부르고 싶습니다. ‘정이 없는 한국 사회’, ‘팔꿈치 사회’, ‘위험사회’는 전환되어 서로 연결된 우리를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4월부터 월에 한번은 춘천시민학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쉼을 통한 삶의 전환과 연대의 시간인 ‘쉼표학교’가 상설운영되고 서로의 삶을 연결하여 서로 배우는 우리가학교와 시민학교를 함께 만들어갈 시민들을 발굴하고 키우는 ‘사다리학교’를 연계 운영합니다. ‘나’로부터 전환하여 ‘우리’를 연결하고 ‘공동체’에서 순환하는 춘천시민학교의 여정은 시민학교의 가치와 문화를 공유하는 시민들의 연대와 협력을 기반으로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한승환(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 지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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