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훌 /  문경민 / 문학동네 / 2022

관계에 지친 우리는 가끔 단절을 꿈꾼다. 모든 관계를 끊어내고 홀로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사는 꿈 말이다. 훌훌, 이 이야기 속 유리도 대학에 진학해서 ‘너절하고 복잡한 기분이 드는 징글징글한 과거’를 싹둑 끊어내고 혼자의 삶을 살 수 있길 바란다.

유리는 어릴 적 자신을 입양한 엄마가 3년 만에 집을 떠난 후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1, 2층으로 생활 공간이 분리되어 식사도 각자 할 정도로 두 사람은 거리 두기를 하며 살았기에 유리의 집으로부터의 탈출은 선명한 미래처럼 보였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딸이자 자신의 엄마인 서정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연우가 함께 살게 되면서 모든 상황이 복잡해진다.

 온몸이 서로 다른 빛깔의 멍 자국으로 물든 연우의 아픔을 들여다보며 유리는 애써 단단하게 봉인해 두었던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친엄마에게 학대당한 연우의 상처에서 자신의 어릴 적 아픔을 마주한 것이다. 유리는 이 시련 앞에서 담담히 연우의 일상을 돌보기 시작한다. 달걀옷을 입힌 스팸 구이를 식탁에 더 올리고, 숟가락과 젓가락 잡는 법을 가르치고, 필통 속 학용품을 챙겨 주고, 바쁜 아침 시간을 쪼개 연우의 등교를 돕는다.

유리 곁에는 각자 다른 사연의 시련을 안고서 꿋꿋이 살아가는 친구 세윤, 미희, 주봉과 고향숙 선생님과 같은 존재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시린 구석을 지니고 있지만 그래서 더 타인의 아픔을 민감히 살피고 공감하고 행동한다. 이들이 내미는 손은 따스하고 내어주는 어깨는 든든하다. 하지만 과하지 않다. 깊이 파고들지 않고, 섣불리 넘나들지 않는다. 일방적이지 않고 무례하지도 않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녹록하지 않은 무거운 서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억울하다 살려 달라 악다구니를 쓰지 않아 인상적이다. 이 소설 첫 장면, 유리는 선생님 컴퓨터 바탕화면의 코믹 재난 영화 포스터에서 온 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외치는 주인공을 보며 ‘나라면 어떨까’를 생각한다. 나라면 어떨까?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이 겪는 재난에 가까운 시련들 앞에서 나라면 어떨까? 죽을 만큼 힘들 때 웃으려고 애쓸 수 있을까? 나의 생존에만 매몰되지 않고 곁의 사람들에게 손 내밀 수 있을까? 이들처럼 따스하게 정서적 연대를 할 수 있을까? 

유리가 스스로 되뇐 것처럼 어쩌면 유리는 아무 책임도 없었는지 모른다. 할아버지에게도 연우에게도. 하지만 유리는 ‘해야 하는 만큼만 할 거야’라며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 할아버지께 드릴 추어탕을 옮겨 담은 뚝배기처럼 은근하고 꾸준한 온기를 그들에게 전한다. 유리가 보여 준 관계에 대한 따스한 책임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자신을 버리고 연우를 학대했던 엄마 서정희에 대해서도. 얼마나 외로웠을까. 엄마를 이해하며 수치심을 자극하는 온갖 어두운 감정들을 훌훌 털고 온전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김정은(남춘천여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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