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시인)

# 착각

3월 9일의 악몽이 지난 뒤 줄곧 뭘 하나 써야 하는데 하다가 며칠이 지나고, 이후 며칠은 주중에 만난 사람들이 차곡차곡 확진자가 되고 내 몸도 괜히 이상해지나 싶더니 진단키트, 피시알, 확진통보의 과정을 거쳐 자가격리에까지 이르렀다. 격리 초반엔 발열, 두통, 기침....이 몰아쳐 종일 누워만 지내다가 통증들이 조금 잦아드니 기다렸다는 듯 다시 악몽의 밤이 고개를 디밀어 결국 컴퓨터 앞에 앉혀놓았다. 

후르르 써내려가다가 다 지웠다. 구구절절 애절해봐도 강산에의 뼈 때리는 ‘한방’에 닿지 못하고, 열심히 눙치고 빗대봐야 류근의 ‘풍자’에 버금하지 못하고, 나름 정연해봐도 유시민의 명료한 ‘분석’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만 한 가지는 꼭 말해야겠다 싶다. 이따금 들려오는 “이재명의 패배는 심상정의 책임”이라는 얘기에 대해서다. 심상정과 정의당으로 대표되는 ‘진짜 진보’는 이재명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자들이 ‘책임’이라는 단어로 농단할 대상이 아니다. 정의당은 민주당이 결여한 ‘민주적 정의’의 틈을 메워주는 소중한 동지이며, 대선후보 토론장에서 심상정이 이재명에게 가한 비판은 민주당과 이재명이 표를 그러모으기 위해 어떤 ‘진보적 양태’들에 눈감고 있었는지에 대한 서늘한 지적이었다.

굳이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윤석열의 당선은 BBK동영상이 공개되었음에도 이명박이 당선된 이유를 일깨워주고, 거슬러 올라가 극우반공주의자 이승만이 우익민족주의자 김구·중도파 여운형·좌파 조봉암을 모두 사지에 몰아넣고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일깨워주고, 쿠데타로 집권하고 헌법을 입맛대로 바꾸며 20년 넘도록 군부독재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를 확인시켜준다. 그러고도 아직 멀었다는 것을, 이 이유들을 아무리 일깨우고 확인시켜줘도 언제든 똑같은 일이 재현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윤석열의 당선이다. 이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에 무지하다는 것, 한참 양보해 알기는 해도 실현해낼 능력이 안 되는 나라라는 사실을 적시한다. 정치공학의 셈법으로 ‘경우의 수’를 따지며 머리를 굴리는 선거로부터 단 한 번도 자유롭지 못한 나라, 보통사람은 꿈꾸는 것조차 불가능한 50억 원이라는 돈을 현역의원 아들이 받아내고 추악한 스캔들이 차고 넘치도록 담긴 녹취록이 공개되어도 가십 취급하는 나라, 복원하기도 수월치 않은 마당에 4대강사업을 다시 하겠다고 하고 전쟁을 하겠다고 하고 여차하면 자위대에 도움을 청하겠다고 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돼지우리에 던져진 진주다. 

“지혜로운 눈만이 영웅을 알아본다[慧眼識英雄]”는 말에 기대면, 대한민국이 어떤 ‘착각’에 빠져 있는지는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백일은 白日이지만, 百日일 수도 있다. 내 착각일지는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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