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시인)

사사오입 개헌 때에도 3선개헌 때에도 유신개헌 때에도 교수들이 활약했습니다. 4대강 국토 유린 때에도 교수들은 그 두꺼운 얼굴을 떼로 내밀었습니다. 친일파 독재 찬양 국정 교과서 음모에도 교수들이 힘을 모았습니다. 작금에 숨죽이며 눈치 살피고 있다가 정권 바뀌자마자 가장 먼저 본색을 드러내는 것도 교수들입니다.

우리나라 대학은 졸업하는 순간 대부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만 가르치는 것으로 세계적 정평이 나 있습니다. 거기서 월급 받는 교수들에게만 쓸모가 있는 게 우리나라 대학입니다. 

조민 씨 입학 취소 원투 펀치로 기회주의 속성을 제대로 펄럭인 대학들 보니 헛웃음만 납니다. 익히 그럴 줄 알았지만,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그 일관된 수준, 존경스럽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학자가 되면 그 시대 인간의 가치가 시궁창에 처박히게 됩니다. 날마다 부끄럽습니다. 시바.


아주 수준 높은 문장

꽃이 피는 시절엔 새들이 새벽 4시 33분부터 울기 시작해요. 새들이 울면 꽃들도 붉어지거나 푸르른 몸매를 조금 어루만지기 시작하지요. 저는 이 새벽에 창문을 막 두드리며 저를 깨우는 동네 새들에게 막 화를... 아닙니다. 막 인사를 했어요. 안녕? 안녕? 그러면 이 새벽에 저를 깨운 새들은 그 파랗고 하얀 얼굴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여주면서 또 안녕? 안녕? 인사를 합니다.

조금 복잡한 문장은 저처럼 골똘히 시를 쓴 적 있는 사람이나 흥미를 가질 거예요. 이 새벽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에즈라 파운드를 읽기도 했어요. 저는 그러면 일어난 김에 우리 동네 104평 주차장 영감님을 뵈오로 가까? 생각하다가 아니지, 영감님한테 또 무슨 잔소릴 들을지 몰라, 싶어서 관두기로 했어요. 꽃이 피는 시절에 우리는 어떠한 잔소리도 듣지 않기로 해요.

사랑하던 여자들은 다 결혼을 했어요. 물론 다른 남자들이었지요. 소식이 끊긴 단 한 여자만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강원도 화천 이북에서 이등병으로 박박 길 때, 사방거리에 면회 와서 삼겹살을 사 줬던 여자입니다. 양조장집 딸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고기를 안 먹습니다. 바보.

제가 이 새벽에 깨어있으면 전세계 애인들이 슬퍼합니다. 시인의 청각이란 건 새벽 4시 33분에 와서 우는 새 때문에 귀가 흔들릴 수도 있는 거니까 특별히, 지금 과테말라에 사는 애인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안성에 사는 사진가 고모에게도, 프랑크푸르트에서 은행 지점장하는 친구에게도, 그러고 보니까 지금 안나 푸르나에 올라가고 있는 애인에게도 말하고 싶어요. 걱정하지 말라고, 다 괜찮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딸 하나 키우고 있는 교수님이 계셨다. 불문학자였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할머니 연세였다. 내가, 맨날 취해서 비틀비틀 떠벌떠벌 어리버리 헤매면 나를 불러서 책을 한 권씩 주시곤 하셨다. 우리 학과 교수님 아니셨다. 나를 참 이뻐하신 건가? 혹시 사위?

자네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을 안 읽고 그 나이를 살고 있네.

어, 시바. 내가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책을 안 읽었는지 어찌 아시냐고요~ 그런데 진짜 쪽집게처럼 내가 읽지 않은 책만 내미셨다. 나는 그때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라던가 로자 룩셈부르크, 헤겔의 변증법 같은 게 훨씬 문학에 이롭다고 생각했다. 책을 받으면 더 기분이 나빠져서 더 더 더, 안 읽게 되더라. 시바.

그런데 어느 가을날, 캠퍼스 잔디밭에 우울히 우울히 앉아있다가 가방 안에 버려두었던 책이 기억이 났다. 그 할머니 교수님이 준 책이었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이었다. 아이고~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을 읽은 지 일주일 후였다. 닝겐실격 다음에 닝겐조건이라니.

사전만큼 두꺼운 책이었는데 나는 그 캠퍼스 잔디밭이 다 어두워질 때까지 그 책을 다 읽었다. 다 다 다, 읽었다. 내가 내 나이를 살아야 할 이유를 좀 알겠더라고. 그래서 나는 대학생이 <인간조건> 안 읽으면 그 나이를 제대로 살지 않은 거라고 믿게 되었다. 때가 이르렀으면 때에 맞는 책을 읽어야 한다. 나는 그 할머니 교수님 부음을 듣고 막 울었다. 사흘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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