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서(소설가)

학창시절 남자 친구는 음악을 전공하려는 사람이었다. 일요일이면 서울로 레슨을 받으러 가서 오후 늦게야 돌아왔다. 가장 빨리 돌아오는 시간이 오후 4시, 늦으면 8시를 넘기기도 한다. 레슨이 언제 끝날지, 언제 버스를 탈지, 차가 얼마나 막힐지 전혀 알 길이 없는 상황에서 난 오후 4시가 되면 외출복을 갈아입고, 내내 전화기 옆에 붙어 앉아 있었다. 집에 하나밖에 없는 둔탁한 전화벨 소리가 얼마나 가슴을 뛰게 했는지 모른다.

통화가 되고 나면,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내달린다. 그렇게 뛰다가 걷다가 하다 보면 춘천시외버스터미널과 우리 집 중간쯤에서 그가 달려오는 게 보인다. 한 번은 화장실에 간 사이 전화벨이 울린다. 급히 볼 일을 마치고 화장실을 뛰어나오는 순간 벨소리가 멈추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20여분이 지나서야 다시 전화가 왔다. 터미널에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선다. 내 차례가 되어 전화를 걸었는데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다시 뒤로 가서 줄을 서야 한다. 그렇게 20여분이 흘러가는 것이다. 발을 구르며 애를 태우긴 그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세상이었다면 아마 한 시간 정도 더 빨리 그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다투고 토라져서 헤어지더라도 일주일 안에는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편지를 써도 며칠은 기다려야 답장을 받을 수 있고, 혹 밤에 쓴 편지를 아침에 다시 보고 민망하여 차마 부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렇게 혼자서 화를 내다가 제풀에 지치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도 해보고 화를 냈던 게 미안해지며 다시 웃는 얼굴로 만난다. 

그래도 이별은 찾아온다. 어쩌다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고, 말없이 끊는 전화에 ‘그일까. 그저 잘못 걸려온 전화일까. 혹시 나를 못 잊은 건 아닌가.’ 수많은 상상을 하며 애만 태우다가 떠나보낸 사랑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거다. 그랬기에 이제는 당연시된 발신번호 표시란 기술이 개발됐을 때, 우린 그 서비스를 얼마나 환영했는지, 거금 2천 원을 기꺼이 감수하며 그 기능을 부가서비스로 신청했다. 예전엔 가족이나 연인, 친구의 전화번호쯤은 외우고 있는 것은 당연했고, ‘나야’라고만 말해도 그 음성을 통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전화가 오면 당연한 듯 이름부터 확인하고 전화를 받다 보니, 발신번호를 확인하지 않으면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편지를 보내고 오랜 시간 답장을 기다리던 때를 잊은 채, 이제는 문자 메시지에 상대가 바로 대답이 없으면 애가 탄다. 그런 사람들의 조급한 마음을 달래주려는지 요즘은 상대가 메시지를 읽었는지 확인하는 기능까지 개발되었다. 그런 편리함 속에 우리는 점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고, 암기력, 청각 능력까지 둔화되고 있다. 어쩌면 용기 없어 놓쳐버린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채, 잃어버린 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은 아주 가끔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본다. 문득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나야’라고 말한다면, 그는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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