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호(강원대 명예교수, 한국메밀연구소장)

어느 날 G경제신문 경기지사를 운영하는 아우로부터 전화가 왔다. 특종 뉴스라고 하며 고구려 시조 주몽이 메밀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메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고종 시대(1236년∼1251년)의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일본왕실서고에서 탈출한 《대연방천제국 고구려 창세기》라는 책(박창화 필사, 김성겸 번역, 도서출판 지샘 2009년 발행) 119쪽에 ‘추모경-상-권3-본기제2’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추모경은 고구려 시조 ‘주몽’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문은 한자어이나 번역문으로 살펴보면, (전략)<류(旒)>후의 남동생 <을경(乙耕)>이 “비록 면맥(麵麥 밀 또는 보리)은 없지만, 교맥(蕎麥)은 많습니다”라 상주하였더니, 상께서 이르시길 “교맥은 차갑고 면맥은 따뜻하니, 어찌 그것들이 같을 수 있겠소”라 하셨다(후략). 동서(同書) 120쪽에는 ‘5생(牲)·7곡(穀)·3주(酒)·6과(果)’라는 말도 있는데 7곡은 서(黍, 기장), 직(稷, 피), 두(豆, 콩), 량(粱, 수수), 속(粟, 조), 교(蕎, 메밀), 소(蘇), 차조기(번역본에는 ‘차조’로 표기되어 있으나 소(蘇)는 차조기를 뜻함)를 가리킨다. 

이 책에서 메밀을 가리키는 ‘교맥’이라는 말이 등장해 연대적으로 《향약구급방》보다 더 앞선, 메밀에 관한 최고(最古)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건국 시기를 기준으로 할 때 이 책은 고려 시대의 《향약구급방》보다 1,200여 년 앞서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당 박창화가 일본왕실서고에서 원저를 빼내 필사한 것이고 원저는 보유하고 있지 않아 사학자들로부터 그 필사본이 사료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필사본은 ‘책보고’라는 유튜브에서 《고구려사략》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메밀에 관한 고문헌에 조예가 깊지 못한데다가 필사본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 평가할 입장도 되지 못하니 임의대로 위의 사실을 문헌적으로 객관화해도 되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위의 사실에 근거해 고구려 초에도 메밀을 이용했다는 것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역사를 정사와 야사로 구분하기도 하므로 원본이 없어서 정사로 인정되지 못하면 야사로라도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없는 사실을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 것이므로 고구려 시대 ‘메밀’이 7곡 중의 하나였음을 말해도 과히 지나침은 없을 것 같다. 

이 칼럼이 메밀연구자로서 지금까지 알려져 온 우리나라 메밀에 관한 최고(最古)의 기록을 뒤집는 첫 글이 될 것 같다. 메밀의 고향인 중국에서는 5∼6세기 중국의 농서인 《제민요술(濟民要術)》을 메밀에 관한 오래된 기록으로 꼽고 있다. 메밀이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전파된 점을 감안하면 고구려 시대에도 메밀이 이용되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추론에 힘을 더하는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 창세기》가 《삼국사기》에 준하는 사료로서의 진가를 인정받는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사족(蛇足) 같은 이야기이지만,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 현상 등에 대한 기록은 당대의 사실과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소홀해 정확한 역사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적지 않다. 정확한 발생 시기를 알기 위해 관심 있는 분들이 도하의 신문과 문헌을 뒤져 보지만 정설이라고 할만한 사실은 찾지 못하고 추정만 할 뿐인 경우가 많다. ‘춘천막국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메밀’과 같이 최초 사용 연대가 오래되어 고문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도 아닌, 근·현대 생활사의 경우임에도 추정만 할 뿐인 현실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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