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미(춘천여성협동조합 이사장)

요즘 다섯 살 둘째의 어린이집 등원이 늘 고역이다. 집에서 레고하고 싶다고 어린이집을 안가겠다고 하는데 출근시간이 임박해오면 언성이 높아지게 된다. 찔통 대마왕이지만 요즘 둘째 아이가 새롭게 잘 쓰는 언어 때문에 웃기도 한다. 다섯 살 병준이는 요즘 ‘스타일’이라는 말을 잘 쓴다. 내복을 입을 때도 “음~ 내 스타일인데?”, 마스크를 쓸 때도 “엄마,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라도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그렇다면, 네 스타일은, 도대체, 뭔데? 라고 진심으로 묻고 싶다. 

스타일(style). 국어사전에 따르면 복식이나 머리 따위의 모양, 일정한 방식, 문학작품에서 작가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형식이나 구성의 특질이다. 내 스타일은 한마디로 개취(개인의 취향)로 구성된다. 나의 스타일은 무엇일까. 20대, 30대, 40대를 거듭나면서 스타일의 유형은 점점 까다로워지지만, 현실은 가장 이질적인 방식으로 그것과 멀어진다. 나의 스타일은 나에게 ‘착장’되지 못한다. 나의 이상향은 나에게 찰떡같이 붙지 않고 언제나 먼 존재인 것이다. 영화배우 김남길은 내 스타일이지만, 내 남편이 되지 못했다. 시인 랭보처럼 비범하게 살다가 멋지게 요절하고 싶었지만, 생애주기 건강검진 결과에도 쫄려하는 두 아들 엄마로 글다운 글은 써보지도 못했다. 자유로운 방랑가가 내 스타일이지만, 나는 17년째 나의 일터를 옮기지 못했다. 나의 스타일은 온통 ‘못한’ 기록이다. 하지만 일종의 지향이고 숨통이다. 나의 스타일에 따라 새벽녘에는 OTT 서비스에 접속하여 자아를 던져버린다. 최근에는 미드 ‘바이킹’을 통해 전설적인 바이킹 영웅 라그나 로스브로크에 매료되어 고대 북유럽의 신 오딘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무언가 야망이나 사명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 인물을 목도하다보면 몸속으로부터 새로운 에너지가 샘솟는 기분이 든다. 이렇듯 스타일을 지향하는 것은 쳇바퀴 같은 일상에 엔돌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못된 버릇을 낳기도 한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스타일에 따라 사람을 고르게 되는 못된 버릇이 생겼다. 나는 그동안 안전한 사람들의 관계에서 너무나 사랑받으며 살아왔다. 소위 혁명가의 신념에 따라 살았던 20대를 거쳐, 의심하고 확인하는 30대, 혁명을 지극히 현실화 시키는 것에 골몰하는 40대가 되었다. 입장에 따라 적/아를 구분하는 진영논리를 멸시하면서도 나는 공정하고, 유연하게 사람을 대하고 있는가 한없이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늘 인간적으로 따뜻한 관계의 온도만을 쫓아가다가, 어느새 세월이 흘러 그 온도가 미지근해질 때 결국에는 스타일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고 멀어지고 거리 두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차이보다는 공통점에 집중하여 사람의 관계를 다시 맺고 싶다. 춘천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라는 무색무취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피 튀기게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고 그 안에서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협업의 과정을 거치고 싶다. 누군가가 따르라 말하는 방향이 아니라, 집단지성으로 함께 에너지가 생기는 조직을 만들고 싶다. 

20대에는 눈을 반짝이며, 나랑 같이 사회운동해보자고 이야기를 하고 다녔었다. 그때 만난 한 남자 선배가 떠오른다. 많이 친해져서 진보정당 가입도 하게 되었고 괜찮은 사람을 한 명 더 만난 거 같아 기분이 좋아질 무렵, 내가 실언을 했다. “여자친구는 있어요?” 흠칫 놀라는 폼새. ‘아, 정말 그냥 물어본 건데….’ 안심을 시켜주기 위해 말했다. “저는 남자친구 있어요.” 더 어색해진 바람의 기운. 진짜 그냥 물어본 건데. 내 스타일이 아닌데. 그렇게 가끔, 나는 실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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