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우 작가, 〈빨간 우체통〉 & 《물병자리 몽상가》

살기 좋은 춘천이긴 하지만, 도심 속에 머물며 일에 치이다 보면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여느 대도시와 다를 바 없다. 그럴 때면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자연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벗과 나누는 소소한 대화가 그리워진다. 독자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벗을 만나러 화천 동구래 마을로 향했다. 《춘천사람들》의 오랜 벗, 정현우 작가이다.

정 작가는 《춘천사람들》에서 2018년 4월부터 2021년 4월까지 4년 동안 그림에세이 〈빨간 우체통〉을 연재하며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최근 그는 〈빨간 우체통〉 중 70편을 모아 《물병자리 몽상가》를 펴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또 오는 7일에는 공지천 푸른쉼터 소공연장 일원에서 열리는 2022 춘천문화예술축제 ‘꽃피는 춘천’의 연출도 맡았다.

호숫가 좁은 도로를 한참 달려 비탈길을 오르자 수많은 야생화들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목조 건물이 동화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정 작가가 두 팔을 벌리며 마중을 나왔다.

Q.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곳이지만 적적할 것 같다?

적적하긴 하지만 이게 창작하기에는 좋다.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근데 또 사람을 안 만나면 어떻게 사나 그리울 때도 있고, 이렇게 가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면 또 참 좋다. (웃음)

Q. 독자들에게 〈빨간 우체통〉의 작가로 유명하다.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

2018부터 4년 동안 140편을 쓰고 그렸다. 《춘천사람들》 창간 당시 이사를 맡았는데 나도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당시 전흥우 편집장이 등을 떠밀어서 하게 됐다. (웃음) 그래서 월간 《태백》에 연재했던 ‘그림엽서’ 형식을 가져와 〈빨간 우체통〉이란 이름으로 시작했다.

Q. 첫 회에서 펜팔을 하고 순정이 존중받던 시대를 떠올리며, 〈빨간 우체통〉을 연애편지 쓰는 심정으로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어땠나? 

쉽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컸다. (웃음) 《태백》은 월간지니까 좀 수월했는데, 주간신문이라서 매주가 고통스럽고 공포 비슷한 걸 느꼈다. 이걸 내가 계속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일간으로 연재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거다. 

《춘천사람들》이 초기에는 월요일 마감이어서 일요일에는 어떻게든 완성해야 했다. 운이 좋은 날에는 한 2시간 만에 끝나기도 했는데, 막히면 하루 종일 산책을 하거나 신문과 책을 읽고 웹서핑도 하며 쥐어 짜냈다. (웃음) 다행히 독자의 반응이 좋아서 인사를 많이 받았다. “잘 보고 있다”, “위로가 된다”는 인사 전화도 받았고 일부러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그 덕분에 4년을 버틸 수 있었다.

Q. 140편 중 기억에 남거나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나?

시를 닮은 글들에 마음이 간다. 〈빨간 우체통〉을 연재하면서 시를 못 썼다. 일주일에 한 편 쓰고 나면 기운이 다 빠져서 글쓰기가 싫어졌다. 명색이 시인인데 시인 타이틀을 떼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 올해는 시집을 꼭 내려고 한다. 지금껏 시집을 딱 한 권밖에 내지 못한 게 아쉽다. 첫 시집인 시화집도 그렇고 지금껏 펴낸 책들이 모두 그림과 사진이 들어가 있는데, 이번에는 오로지 시로만 채울 생각이다. 

정현우 작가의 신작 〈아버지의 자전거〉

Q. 《물병자리 몽상가》에 담긴 70편은 어떻게 골랐나?

‘달아실출판사’가 모집한 20대 여성 6명이 골랐다. 요즘엔 MZ세대에게 어필해야 하는 세상이라 그들의 취향과 안목을 존중한다. MZ세대가 읽고 공감한다면 무척 기쁘겠다.

Q. 다시 연재할 생각은 없나?

원고료를 많이 준다면 하겠다. (웃음) 근데 어려울 것 같다. 〈빨간 우체통〉 마지막 회에서 인간은 “젊어서든 늙어서든 한 번쯤은 열심히 살도록 설계되어 있다. 열심히 살아야 할 때가 왔다”라고 작별을 고했었다. 지난해 양구 군의회에 걸린 500호짜리 〈돌산령 지게 놀이〉와 화천 중고등학교의 벽화 〈추억의 화천 사계〉 제작에 에너지를 다 쏟아부으며 정말 열심히 살았다.

한 석 달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고선 최근에 다시 붓을 잡았다. 올해는 시도 많이 써야 하고 전시회도 열어야 한다. 

Q. 그럼 대신에 쉬는 동안 정리해둔 생각을 이 자리를 통해 들려달라.

여전히 반자본·반문명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예술이 해야 할 일이다. 욕심을 버리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예술가가 예술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예술사에 남겠다는 야심과 그저 먹고 사는 생계 수단이다. 난 후자다. 간섭 안 받고 살려다 보니 예술을 택한 거다. 

진정한 예술가는 안정된 삶을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야 한다. 그래서 ‘크눌프’와 ‘조르바’를 동경한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다. 가난해도 불안해할 것 없다. 인생에 가끔 행운이 찾아온다. 나도 그랬다. 교과서에 작품이 실리고, 생각지도 못한 대작 작업 의뢰도 들어오고, 그러니 맘껏 자유롭게 살아보자.

Q. 그럼 생계 수단으로 그림과 책 중에 뭐가 더 잘 팔리길 바라나?

지난해 11월 ‘느린시간’에서 열린 개인전에 걸린 모든 작품이 완판됐다.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솔직히 책이 잘 팔리는 게 좋다. 그림은 돈도 많이 들고 필요한 게 많지만, 글은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되니 밑천이 들지 않는다. 제일 부러운 사람이 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웃음) 《물병자리 몽상가》와 새로 펴낼 시집이 잘 팔리는 행운이 찾아오길. (웃음)

Q. 7일에 문화예술축제 ‘꽃피는 춘천’의 연출을 맡았다. 잘 준비하고 있나?

큰 공연은 아니지만 모처럼 시민들이 모여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되어 기쁘다. 4인조 재즈 밴드 ‘모퉁이프로젝트’를 기대하고 있다. 많이들 와서 보시라.

Q. 치열하게 살아가는 독자와 시민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낭만을 가져라!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사람들이 낭만을 잃고 있다. 전쟁터 같은 일상을 살더라도 가슴 한켠엔 낭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체 게바라’의 아우라도 낭만에서 온다. 그는 전쟁터에서도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에호’, ‘니콜라스 기엔’, ‘레온 뻴리빼’ 등의 시를 필사했다.

낭만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 성숙한 인간이다. 낭만을 잃지 않는다면 힘들어도 살 수 있다. 가난이나 우울증, 갈등도 승화시킬 수 있다. 낭만은 승화이다. 낭만이 곧 예술이다. 예술의 힘이 그런 거다.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할 수 있다는 거 그게 매력이다. 낭만성을 키우려면 예술을 가까이해야 한다. 먹고 살기 바쁘더라도 일부러라도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면 정신에 단단한 근육이 생긴다.

둘째는 과정을 즐겨라! 도가(道家)에서는 길과 목적지를 구분하지 않는다. 길이 곧 목적이다. 인생에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그저 과정을 즐길 줄 아는 사람 그게 중요하다.

셋째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렷한 주관을 갖고 밀고 갈 줄도 알아야 하지만 주변으로부터 나를 점검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거 잘못하면 사람이 이상해진다. 특히 예술가들은 ‘자뻑’도 필요하지만 객관화를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그가 정성껏 내려준 커피가 차갑게 식은 줄 모를 만큼 긴 대화가 끝났을 때 기자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오랜 벗의 안부를 전하는 이 글이, 자유로운 그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전해서, 일상에 지친 독자들에게 작은 쉼표하나 주었길 바란다. 담지 못한 많은 말들은 훗날을 기약한다.

박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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