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시인)

이외수 선생의 조사(弔辭)를 쓰다

조사를 부탁하는 기자의 청을 여러 번 고사했다. 결국은 써야 한다는, 쓰게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랬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다시 전화가 왔을 때,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벌써 오전이 다 간 뒤였다. 마감인 오후 4시가 거의 임박할 때까지 컴퓨터 빈 화면엔 까만 커서만 무심히 깜박거렸다. 그 장면을 첫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러자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弔 辭] 이외수 선생님의 영면에 부치는 글

커서만이 깜박이는 컴퓨터 빈 화면을 오래, 바라봤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았는데, 선생님과 제가 공유한 연대기의 앞쪽 몇 페이지를 겨우 넘겼을 뿐인데, 눈뿌리가 아팠습니다.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고, 길지 않은 이 글을 마치기는커녕 마감 시간 전에 시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들 때쯤, 문득, 세 번째 대담집을 준비하던 중에 특유의 장난기 어린 얼굴로 던졌던 선생님의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하 형, 먼지가 얼마나 큰 놈인지 알아?” 답을 바라던 의아함 가득한 제 눈을 보며 선생님은 질문 하나를 더 던졌지요. “하 형, 우주가 거기에 다 들어간다면 먼지가 클까, 우주가 클까?”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때로부터 꼭 30년이 지났습니다. 춘천으로 이사를 오고 인사를 드리러 교동 선생님 댁으로 들어서던 날이 기억의 창고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새로 시작한 장편소설 얘기로 밤을 새우며 마시던 불그레한 보이차가, 교도소 문을 단 이층 집필실이,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던 중에 허공에서 툭 떨어진 담배꽁초가, 그걸 보곤 꽁초가 떨어진 허공에다 대고 “노인네가 구경만 하니 심심했구먼”하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폴폴 먼지처럼 일어납니다. 이 먼지들 속에도 하나씩의 우주가 들어가 있는지, 이제는 물을 길이 없네요.

선생님과의 기억 대부분은 흐드러진 웃음, 견고한 현실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유쾌한 농담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일찍이 고백한 일이지만, 참 많이 부러웠습니다. 독자들로부터의 사랑도, 문턱을 닳게 하던 유명인들의 방문도, 트위터의 촌철살인도. 천형처럼 드리워진 예술가의 외로움까지 그랬었지요. 어느 날 어둠 속에 숨은 복병처럼 병마가 닥쳤을 때 빼들었던‘존버’라는 칼은 이제 제 부러움의 마지막 대상이 되었습니다.

“상처가 없으면 온전해질 수 없어. 어쩌면 상처 때문에 온전해지는 건지도 몰라. 그게 없으면 텅 빈 골목을 지나가는 바람이, 고개를 푹 숙인 청년이, 왜 우리에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해. 내가 끝까지 잃고 싶지 않은 건 그거야.”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3천 매가 넘는 원고를 어이없는 실수로 잃어버렸을 때, 선생님이 해주신 그 말은 뼈에 새겨진 듯 또렷합니다. 상처와 아픔이 그저 상처와 아픔만이 아닌 이유를, 오늘, 다시, 뇌어봅니다.

오래 비워둔 감성마을 몽요담 물 그늘 위로 봄꽃들 한껏 날고 있겠지요. 어느 날 감성마을에 갔을 때, 요즘 웬 노인네 하나가 찾아와 빈 낚싯대 드리우고 있어, 라는 괴상한 소문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계시지 않은 그곳에 앉아 있어도 그리 외롭지 않을 테지요. 그러면, 누웠는지 앉았는지 모를 자세로 삐딱하게 벽에 등을 기댄 선생님을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생각도 [弔 辭] 이외수 선생님의 영면에 부치는 글하지 않겠지요. 제 삶에 어둠이 깃들고 힘에 부쳐 무너지려 할 때 제 어깨 위에 얹혔던 당신의 온기와 무게를 다시 생각나게 해주신 것에 새삼 머리를 숙입니다.


착한 도

서울의 빌딩 숲이 훤히 바라보이는 사찰에 교육국장으로 있는 M스님이 카톡으로 사진 두 장을 보내왔다. 하나는 지난달 춘천에 왔을 때 내가 슬며시 건네준 글씨를 족자로 만들어 걸어놓은 것이고, 하나는 그 족자가 걸린 스님의 방 정경이다. 두 사진을 받고 포스팅을 해야겠다 싶어 페북에 들어왔는데 제목을 ‘도(道)’라고 붙였다가 ‘착한 도’라고 고쳤다. 족자 안의 글과 명전차 향내 그윽한 스님의 방 다탁 위 자루가 깨진 주전자에 새삼 눈길이 간 때문이다.

족자에 담긴 “無欲心安爲道(무욕심안위도: 욕심이 없고 마음이 편하면 그것이 곧 도)”는 이뤄내기가 쉽지는 않겠으나 뜻은 무척 단순하고 소박하다. 뼈를 깎고 살을 에는 용맹한 정진이 닿는 곳도 결국은 욕심과 번뇌가 온전히 스러져 마음 볶일 일도 마음 다칠 일도 없는 그 어떤 곳일 텐데, 싶다. 생각해보면 이 또한 작지 않은 욕심이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여하튼, 그 경지를 상정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던 때에 글씨를 써두었는데 오랜만에 스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건넸었다. 그게 푸른색 족자 안에 담긴 모양이 편해 보여 좋다. 

스님의 방 사진에서 눈에 띄는 건 둘이다. 하나는 구석에 얼핏 보이는 책들. 그 책들은 스님이 출가 전 서울의 국립대학 수의과를 나와 동물병원을 꽤 오래 운영한 수의사였다는 것, 세속종교에 두루 관심이 많아 영성과 관련된 독서의 이력이 깊었다는 것, 출가 후엔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들어가 머리에 쥐 나도록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 <불교 인체발생학>, <불교 체질의학론>, <백골관 수행과 불교해부학>같은 ‘과학’ 논문에서부터 <불교정신과학ㅡ귀신론> <달마불식 공안과 설악무산 선시> <잇큐 선사> 같은 ‘선기(禪氣)’ 가득한 논문까지, 모두 책과 무관하지 않은 그의 인생을 대변한다. 

스님의 방 사진에서 눈에 띄는 다른 하나는, 명전차가 우려지고 있는 주전자의 부러져 짤막해진 자루다. 사진을 받고 “처음부터 저렇게 짤막한 건가요, 깨져도 그냥 쓰는 건가요? 아무래도 후자일 듯 ^^” 하고 보낸 내 톡에 대한 스님의 답톡은 손가락 V자 이모티콘. 두 장의 사진에 담긴 것들을 “착하다”는 관념에 욱여넣는 건 억지스런 일이 분명하지만, 험악한 말들 난무하고 비까번쩍한 요물단지들 또한 난무하는 이즈음을 생각하며 억지 좀 부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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