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빈 대학생 기자

“안전하게 이동하고 싶다.” 우리는 당연히 누리는 일상이다. 그러나 여기, ‘우리’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설 연휴 전날이던 2001년 1월 22일, 전남 순천에서 서울로 올라온 70대 장애인 노부부가 4호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리프트를 따고 지상으로 올라가던 중, 리프트를 지탱하던 쇠줄이 끊어졌다. 부부는 7m 아래로 추락했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안전관리 장치가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아 무방비인 상태에서 참사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오이도역 추락 참사’로 ‘장애인 이동권’이라는 말이 처음 생겨났고,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아이러니한 운동이다. 우리는 가까운 거리는 걸어서, 혹은 버스를 타거나 급하면 택시를 타기도, 거리가 멀다면 전철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 사회 속에서 ‘우리’라는 말에 장애인은 없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휠체어를 탄 채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 틈으로 바퀴가 빠지기 일쑤고, 서울 지하철 22개 역에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실정이다. 

2020년 인권위가 발표한 ‘장애인 이동권 강화를 위한 개별적 이동수단에 대한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장애인 응답자의 48%가 ‘저상버스 이용(승차) 거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승차거부 이유는 ‘버스 경사판 작동법을 기사가 모르거나 작동 불량’(69.1%)이 가장 많았고, ‘다른 승객의 불만’(14.5%)이 ‘기사의 다음 차량 이용 권유’(39.1%), ‘승객이 많거나 만차’(38.2%), ‘무정차 통과나 접근 전 버스 출발’(34.5%)이라는 답이 많았다. 결국 승차거부를 당한 뒤 외출을 포기(13.6%)한 이들도 있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곧장 혐오로 치환해버리는 사회가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언론의 역할이 크다. ‘그들은 왜 월요일 아침에 나서는가’,‘시민을 볼모로 잡은 시위’ 등 자극적인 제목만을 토해내며, 시민의 불편에 집중한 기사를 작성한다. 장애인은 시민이 아닌가? 당신의 출근길은 며칠 불편했겠지만, 장애인들의 출근길은 단 하루도 편한 적이 없었다는 내용은 기사에서 찾기 어렵다. 또한 이 상황이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본질은 부정한 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갈등을 부추긴다. 

정치 역시 한몫한다. 사회적 약자를 골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드는 전략을 구사하고 표를 얻는다.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는 “장애인 시위는 서울 시민을 볼모 잡는 부조리다”, “한 번 더 하면 내가 가서 제지하겠다” 등 혐오의 글을 연달아 게시했다. 이 문제에 대해 TV 토론회에 나가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대표와 토론하던 중에도 “점진적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속도 문제 아닌가.”라고 말했다. 20년이 넘게 투쟁해왔는데, 속도의 문제라고 일축한다. 이 자체로 나쁘지만, 이 모든 것이 용인되고 당연시되어가는 사회라는 점이 상당한 무력감을 준다. 

“시끄럽게 우는 저 아이는 나의 과거였고, 답답할 만큼 느리게 걷는 저 노인은 나의 미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욕설과 비아냥에도, 경멸 어린 눈길에도 그들은 지하철에 오른다. 언제부터 타인의 인권보다 나의 편의가 더 중요했을까. 언제부터 누군가의 죽음 앞에 나의 시간이 더 소중했을까.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속에 그들을 ‘우리’에서 배척하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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