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경 개나리미술관 관장

거두택지길 큰골 공원에서 조금 걸어가면 사색을 즐길 만큼 정적이 감도는 골목길 모퉁이에 벽면 가득 예술작품이 걸린 새하얀 공간을 만날 수 있다.

‘개나리미술관’. 정현경 큐레이터가 춘천의 시화인 개나리에서 이름으로 따온 시각예술 전문 갤러리로서 젊은 신진작가들을 위한 활동의 장, 시민을 위한 문턱 낮은 미술관 등의 희망을 담아 지난해 문을 열었다. 춘천은 갤러리카페, 소규모 전시장 등이 있으나 전문적인 갤러리는 부족한 상황이다. 특히 전문기획자가 있는 갤러리는 없다. ‘개나리미술관’은 단순히 대관의 형태로 운영되는 공간이 아니다. 춘천 안팎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가는 신진작가 발굴을 기본으로, 전문예술작가 전시부터 미술 이론 강좌, 시각예술교육 프로그램, 지역 미술시장 활성화를 위한 아트페어, 신진작가 공모전 등 다양하고 참신한 기획이 이루어진다. 춘천에 미술애호가가 적다는 선입관이 있다. 하지만 오해다. 그곳에서 전시가 열리면 다양한 연령 특히 젊은 세대 미술애호가들이 몰려드는 등 춘천미술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춘천의 소금 같은 기획자 정현경 관장을 소개한다.

Q. 제주도가 고향이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춘천에 이주해온 예술가는 많아도 기획자는 드물다. 춘천에 온 계기는 무언가?

처음부터 기획자는 아니었다. 93학번이고 학부에서는 역사를 전공했다. 졸업 후 출판사에서 일하다, 당시 붐이 일어난 웹분야로 진출해 ‘윤디자인’의 콘텐츠팀 팀장 등 10여 년 동안 웹디자이너로 일했다. 성향상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 크다. 춘천에 오게 된 것도 그런 이유다. 

춘천은 대학 때부터 동경하던 곳이었다. 춘천 가는 기차를 타고 차창 밖으로 보이던 풍경이 마음속에 늘 그림처럼 새겨져 있었다. 2012년, 남편의 회사가 춘천으로 이전하면서 아무 연고도 없던 춘천으로 왔다.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였고, 나로서는 경력 단절로 향하는 길임에도 주저 없이 이주를 선택한 것은 그런 동경과 호기심 때문이었다.

Q. 그럼 어떤 계기로 예술기획자가 됐나?

늘 사적인 관심사를 따라 살아온 사람이라, 마음이 향하는 대로 움직였다. 처음에는 오지랖 넓은 이방인으로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고요한 물처럼 흐르는 도시에 매료됐지만, 경력 단절로 인해 갑갑함을 느끼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 다닐 나이가 되자 좋아하던 것을 다시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고 당장 춘천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다. 한때 미대를 희망할 정도로 미학과 철학을 좋아했기에 집 근처에서 민화를 배웠고, 지역의 다양한 전시회를 모니터하는 춘천문화재단 모니터 요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역 작가들과 소모임을 가지며 자연스레 교류가 시작됐고, 이어 춘천에서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전에 도슨트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작품과 관객을 연결하는 기획에 관심이 커졌다. 그러다 2015년 강원민족미술인협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됐는데, 기왕 일하게 된 거 제대로 하고 싶어서 2016년에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해 예술기획을 공부했다. 춘천에 와서 그렇게 배회하고, 끼어들고, 베풀고 나누며 점차 이방인이 아닌 이웃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Q. 기획자로서 어떤 활동을 해왔나?

2015, 2017, 2018, 2021년 총 4번의 ‘강원미술시장축제’를 기획했다. 협회를 기반으로 시작했으나, 2017년부터는 강원도 전역의 작가들을 초대하여 작가주도의 미술장터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2019년에는 ‘터무니맹글’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의 예술기획을 맡아 약사명동 지역주민, 작가들과 함께 ‘사람무니’, ‘약사詩집’, ‘약사ㅓ산책’ 등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20년에는 홍천 와동분교와 탄약정비공장 등에서 펼쳐진 ‘강원키즈트리엔날레’의 수석큐레이터로 활동한 바 있다.

Q. 춘천에는 예술기획자가 드물다. 기획자로서 활동 여건은 어떤가?

전공 분야가 시각예술이기 때문에, 시각예술 부문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우선 작가들이 많다는 점이 장점이다. 춘천에는 강원도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전업 작가로서 자신만의 길을 구축하고, 정진해 가는 예술가가 많다. 

아쉬운 점은 문화도시 춘천에 시각예술 기획자가 희소하다는 점이다. 시각예술기획은 또 하나의 예술 장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전시장에 단순히 거는 행위를 넘어 춘천이라는 지형에 예술로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다. 하루빨리 시각예술기획 분야의 전문 인력을 키우고 활동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장이 열리길 바란다.

Q. 그러려면 제대로 된 시립미술관이 필요하겠다?

그렇다. 시립미술관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학예인력 일자리가 생길 테고 그러면 좋은 기획도 나오게 된다. 문화재단도 다양한 사업을 위해서 기획자를 찾고 있지만, 기획자가 없으니 예술기획에 대한 지원보다는 작가에 대한 지원 위주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Q. 시립미술관과 더불어 시급한 과제가 무언가?

춘천지역의 미술사를 이제라도 제대로 써야 한다. 그를 위해 작고한 작가들의 아카이빙이 중요하다. 지난해 춘천시립미술관 건립을 위한 화두를 던지기 위해, 춘천의 작고 작가와 신진작가를 매칭하여 지역 미술의 과거와 미래를 한곳에서 조망한 전시회 〈예술가의 생애-요람에서 무덤까지〉 기획을 맡았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안타까운 장면들을 계속 목도했다. 

극히 일부 유족만이 집이나 창고에서 작고 작가의 작품을 보관하며 작품 보존에 애쓰고 있었다. 작고 작가들 대다수가 작품의 존재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다. 요절한 작가분들의 작품은 동료 작가가 본인의 수장고에서 어렵게 보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마저도 故정연삼 작가처럼 화재로 유실되는 안타까운 사례가 있었다. 故박희선 조각가의 작품도 소양로 생가 창고에 다수 남아있지만 목조각이라 제대로 보관하지 않으면 훼손될 우려가 크다. 또 일제강점기 때부터 활동해온 故이철이, 故장일섭 작가의 작품도 제대로 보존하고 반드시 조명받아야 한다. 

춘천에는 그런 분들이 참 많다. 국공립미술관이 있어야 이 모든 게 가능하다. 작가들의 수준 높은 작품을 보관하고, 지역 미술사 연구와 기획전시, 더 나아가 신진작가의 양성까지 담당하는 공공 미술관 설립이 꼭 필요하다. 제대로 된 시립미술관 하나 없으면서 문화도시라고 자임할 수 있나? 

Q. 지난해 9월 ‘개나리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왜 마련했고 갤러리로서 어떤 특징이 있나?

단순했다. 나는 일할 곳이 필요했고, 내 일은 전시기획이니까 전시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7~2018년에 대안공간 ‘명동집’을 작가들과 함께 운영하며 전시기획을 2년간 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협회나 단체와 상관없이 오로지 내가 직접 전시공간을 운영하고, 춘천에 꼭 필요한 전시공간을 만들어보자 생각했다.

춘천에는 기본을 갖춘 온전한 갤러리가 부족하다. 다른 용도였던 공간을 갤러리로 활용하는 게 대부분이다.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기본에 충실한 공간에서 좋은 작가들이 개인전 정도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작품이 온전히 돋보이는 전시공간인, 미니멀한 화이트 큐브 갤러리(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모양의 공간이며 장식되지 않은 흰색 벽과 천장에 광원이 있다)말이다. 오로지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큰 장점이다.

Q. ‘개나리미술관’ 운영과정에서 느낀 점과 앞으로 계획은?

지난해는 초대전을 몇 차례 열면서 홍보의 기간을 가졌다. 올해는 〈room-은둔과 안온〉, 〈개나리아트페어〉 등 총 2번의 그룹전을 열었다. 특히 2월에 ‘개나리미술관 신진작가 공모’를 받았는데, 전국에서 50여 명의 예술가가 지원해왔다. 그저 SNS를 통해 알렸을 뿐인데 개성과 역량을 갖춘 작가들이 다수 지원해와서 무척 놀랍고 고무적이었다. 

그들 중 최인엽(추상화), 배요한&박예지(유리공예·조각), 김지민(회화) 총 3인(팀)을 엄선하여, 지난 4월을 시작으로 8월, 12월에 전시회를 연다. 청년작가정기전도 사라진 춘천에서 신진작가 공모전이 춘천 미술계가 지역을 넘어 활성화되고 새로운 예술의 경향과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데 작게나마 보탬이 되길 바라고 있다.

개관 이후 신선한 경험과 느낀 점이 많다. 첫째, 춘천 미술계에 아직은 생소한 젊은 작가들의 전시에, 그동안 지역 전시회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관객들 특히 젊은 관객들이 많이 다녀갔다. 흔히 춘천에 미술애호가가 적다는 오해가 있는데, 미술애호가가 적은 게 아니라, 양질의 기획이 적었을 뿐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그들은 서울로 전시를 보러 다니는 애호가들이다. 양질의 기획만 있다면 춘천의 전시문화는 서울 못지않게 활성화될 수 있다. 

둘째, 여기서 전시를 열며 관계를 맺게 된 다른 지역 젊은 작가들이 춘천의 작가들과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개나리아트페어〉에서는 단순히 작품판매를 넘어, 춘천의 미술계를 한눈에 조망하고, 작가와 미술관계자, 관람객들이 서로 소통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네트워킹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개나리미술관’이 지역 미술 활성화를 위한 거점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오는 7월과 9월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큰 규모의 전시기획을 맡았다. 7월 전시는 춘천문화재단이 주최하는 10인의 신진작가들이 함께하는 전시로서, ‘세계와 나, 그 사이’라는 주제로 펼쳐진다. 9월에는 친환경 컨셉의 아트페어를 연다. 많은 관심 바란다. 그리고 미술사, 예술이론에 대한 학습도 병행하고 있다. ‘강원키즈트리엔날레’에서 인연이 된 동료와 미학스터디를 지난해 8월부터 온라인으로 매달 한차례 해오고 있다. 스터디 멤버가 30명으로 늘었는데 매번 10명 이상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Q. 언젠가 춘천을 떠날거라고 들었다. 왜 떠나려고 하는가?

그야말로 먼 훗날이다.(웃음) 춘천을 떠나고 싶은 게 아니라, 나고 자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이다. 제주도 중산간 작은 마을에 집이 있다. 먼 훗날 그곳에서 콜라비 농사를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웃음) 아니면 빈 창고를 뜯어고쳐서 ‘개나리미술관’ 제주점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정 관장의 귀소본능을 탓할 수 없지만, 아쉬운 마음이 큰 건 어쩔 수 없다. 아무래도 춘천은 그에게 더 많은 숙제를 내줘야 할 것 같다. 떠날 생각 할 겨를이 없도록 말이다.

박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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