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 하엘 엔데 저 / 한미희 역
비룡소 / 1999

드디어 너의 시험이 끝났구나. 며칠 동안 고생 많았지? 지켜보는 내내 엄마도 속이 많이 깎였단다. 그러다가 이 책을 꺼냈지. 우리 딸 봄이와 엄마가 함께 읽었던 《모모》. 요즘 축 처진 네 뒷모습을 보며, 꽉 닫힌 네 방문을 보며 ‘아무튼 모모에게 가보게’라는 말이 떠올랐어. 네가 혹시 회색 신사들과 계약을 한 게 아닌가 겁이 났나 봐.

봄아, 작은 키에 칠흑같이 새까만 고수머리의 말라깽이 모모를 기억하니? 왜 있잖아, 옛날 원형 극장 터에 사는 까만 눈의 아이, 모모. 다 낡아 빠졌지만 주머니가 많이 달린 헐렁한 웃옷을 복사뼈까지 치렁치렁 입고 다녔지. 많은 사람들이 회색 신사의 꾐에 빠져 자신의 시간을 빼앗길 때 모모만큼은 ‘시간’이 무엇인지 알았잖아. 그랬기 때문에 모모는 용기 있게 시간 도적단들과 맞서 싸울 수 있었는지 몰라. ‘시간의 꽃과 장엄한 음악,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을 갖고 있기에 그런 황금빛 시간의 사원을 하나씩 갖고 있다’는 그 말을 어린 모모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엄마는 정말 모모가 백 살이라는 걸 믿을 수밖에 없어.

엄마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어. 공연히 서글퍼진 이발사 푸지 씨와 같은 날이 있었고, 이야기꾼에서 사기꾼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더 이상 꿈꾸지 못하는 기기 씨와 같은 날,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스스로를 바쁜 상황 속에 몰아넣은 니노 씨 같은 날들이 있었지. 그런 내게 호라 박사가 말했어.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니까. 또 자기 시간을 지키는 것도 사람들 몫이지.…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멀고 귀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하단다.’ 

봄아, 우리 잊지 말자.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 속에 깃들여 있다’는 것을, ‘인생에서 중요한 건 딱 한 가지야. 뭔가를 이루고,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뭔가를 손에 쥐는 거지. 그런 사람한테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거야. 이를테면 우정, 사랑, 명예 따위가 다 그렇지’라는 회색 신사들의 거짓말에 속은 사람들이 얼마나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졌는지를… 네가 무엇을 하든 엄마는 널 응원하겠지만 네가 네 마음속의 꽃과 음악을 잊지 않길 기도할게. 

잘 듣지도 못하는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1시간과 앵무새를 보살피는 15분, 휠체어를 탄 다리아 양에게 꽃 한 송이를 선물하기 위해 그녀를 방문하는 30분, 이 모두를 시간 낭비라고 말하는 회색 신사의 속삭임에 속지 말자.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주어 서술어 목적어 따위가 아니고 오히려 관형어와 부사어라는 사실을 기억하렴.

《모모》에는 명문장과 명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엄마는 오히려 이 단순한 문장이 더 많이 기억에 남는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이 안 되는 단골 노인들의 출입을 금지 시킨 니노에게 릴리아나가 한 그 말. 

“꼭 냉혹해져야 되는 거라면 나 없이 해 봐요!”

사랑하는 너 없는 내 시간에 어떤 꽃과 음악이 남을지 난 모르겠다. 오늘 저녁엔 곧 집으로 돌아올 너와 <모모>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럼 이만 총총.

이은희(봄내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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