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운순 (강원이주여성상담소장)

며칠을 두고 미루던 영화 〈아이카〉를 보았다.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오늘, 갓 낳은 아이를 두고 도망쳤다’라는 카피가 등장하는 예고편을 보며 꼭 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영화였다. 

영화는 71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키르기스스탄 출신의 영화감독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는 신문 기사의 한 통계 수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2010년 모스크바의 산부인과 병원에서, 248명의 아기들이 키르기스스탄 출신의 엄마로부터 버려졌다> 

이 기사를 읽고 한동안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키르기스스탄 여성들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자신의 아기들을 포기했으며, 남의 나라에 버려야 했을까? 심지어 중앙아시아의 가족 중심적 문화권 여성인 그녀들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는 내내 모스크바의 폭설과 빙판을 헤매는 ‘한 여성’을 조명한다. 카자흐스탄에서 쌓이는 빚을 갚고자 이주한 여성 노동자 아이카, 재봉사가 꿈인 그녀가 낯선 땅 모스크바에서 겪는 처절한 일상, 갓 낳은 아기를 두고 병원의 낡은 화장실 창문을 통해 도망치는 아이카, 절박한 표정으로 폭설이 쏟아지는 거리를 내달리는 그녀에게 재촉하듯 울리는 휴대폰 소리, 백년만에 내린다는 폭설을 뒤로하고 그녀가 도착한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닭 도축장, 닭 껍질을 벗기는 무표정한 아이카, 방금 2주 치 급여를 떼인 그녀에게 자꾸 울리는 빚 독촉 전화, 집으로 가는 길, 커튼으로 방을 나눈 좁고 낡은 숙소, 하혈을 하는 배 위에 얼음주머니를 올려놓는 아이카….

영화를 보는 내내 지난 2020년 12월 비닐하우스에서 사망한 속헹씨 사건을 기억해야 했다. 한국에서의 4년 9개월, 속헹씨가 죽어간 시간과 영화 속 아이카의 시간이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속헹씨의 근로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 시급은 그해 최저임금인 6천30원, 근로계약서엔 휴게시간이 표시돼 있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 63조는 농어촌 노동자에게 근로시간 및 휴식·휴일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것으로 고향의 늙은 부모와 남동생 등 많은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다. 그녀의 숙소 내 서랍에서는 다음해 1월 10일자 프놈펜 항공권이 발견되었다.

빈곤에 의한 이주화, 게다가 여성 노동자의 이주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이제라도 이주민, 그리고 이주노동을 위해 유입된 여성의 여성권을 강화하고 안전망을 강화하는데 관심을 보여야 할 때이다. 1963년 우리나라에서 이주 노동자로 서독에 간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의 숙소는 현지인과 같은 아파트였다고 한다. 비닐하우스나 컨테이너가 아니었다. 매해 수많은 이주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우리나라가 한 번쯤 되새겨 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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