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상(頭像)조각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남녀 사이에 최고의 경지랄까? 학교 때 역사책에서 봤던 참수당하는 남편의 머리를 달려가서 치마폭에 받아 낸 여자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어려서는 끔찍하고 이해도 안 됐는데 나이가 드니까 지금은 저도 ‘받겠다’에요.” 

여인은 사랑하는 이의 ‘머리’가 ‘그’라고 생각한다. 그의 팔, 다리나 그의 심장이 아닌 그 사람의 머리를……. 우리의 신체에서 인간존재의 본질은 어느 부위가 대변한다고 믿는가?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여겨지는 신체 기관은 바로 다름 아닌 (뇌 신경과 얼굴을 지니고 있는) 머리가 아닐까? 한국 조각의 거장인 권진규의 두상(頭像) 작품들을 떠올려 보면, 조각가들이 끊임없이 창조해내는 두상 조각에 담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5월 22일부터 6월 5일까지 개나리미술관에서 펼쳐진 안성환 조각가의 개인전 《무심無心-쉬어가다》에서는 깨어진 기왓장 위에 석고로 직조하여 창조해낸 두상, 흉상 조각들이 마치 비석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권진규의 초상 조각들처럼 주인이 있는 얼굴들도 아니다. 누구의 얼굴도 될 수 있으며 그 누구의 얼굴도 아닌, 무수히 많은 주인 없는 머리들이 관객들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시간성을 지닌 과거의 기왓장과 대화하듯이 현재의 작가 손으로 빚어나간 얼굴들 속에서 어떤 경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표정을 본다.

전시장의 또 다른 한편에는 남과 여가 둘인 듯 하나인 얼굴이 있었다. 마치 플라톤의 ‘향연(Symposium)’에 실린, 원래는 자웅동체였던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두 사람이 한 몸이었던 인간은 제우스의 저주로 반반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 반쪽이 된 사람은 완전한 합일을 위해, 잘려나간 반쪽을 찾아다닌다. 그 결핍과 욕망이 바로 사랑(Eros)의 기원이다. 안성환 작가의 <위안-love>는 이처럼 서로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그 태초의 얼굴을 창조해낸 듯, 완벽하게 채워진 영원한 합일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조각가는 인간을 창조한 신(神)에 비유되기도 한다. 조각가가 창조해내는 인간의 형상에서 재료, 형태 등의 물성 너머로 정신적인 영역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다. 안성환 조각가의 《무심無心-쉬어가다》 전시에 온 한명 한명의 관객들이 위안을 얻으며,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작품을 소장하는 것은 작가가 창조해낸 조각으로부터 돌, 석고 너머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위안과 안정을 주는, 때론 나의 반쪽인, 그리고 어쩌면 나 자신을 반영하는 저 머리로부터.  

정현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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