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정 (시인)

“마음에도…… 뭐가 묻든 다 지울 수 있지만 불에 그슬리면 돌이키지 못하지.”

“그럼 지울 수 없는 얼룩이 생겼을 땐 어떻게 해요?”

“글쎄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꾸벅꾸벅 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어지는 대답이 꼭 잠꼬대처럼 들렸다. 그때는 사람들이 옷을 입고 다니는 이상 세탁소가 없어질 일은 영영 없을 줄 알았다.

 

전석순 작가의 신작 소설집 《모피방》이다. 성실하게 생업을 다하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아버지의 이야기는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한동안 먹먹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한다. 나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일 경우 더더욱. 거의 완성된 그림에 아직 그려지지 않은 빈 도화지가 오버랩 된다. ‘너’와 아버지의 빽빽하게 채워진 세탁소. 그리고 ‘너’와 아내의 아무것도 없는 모피방이다. 작품은 앞으로 비워질 공간과 채워질 공간으로 대비되며 한 세대와 다음 세대를 연결하는 끝점과 시작점을 도킹한다. 철거될 세탁소를 닮은 아버지의 오늘과 모피방을 닮은 내일의 아기를 이어주는 ‘너’는 먼 훗날 자라나는 아이에게 차분히 들려줄 것이다. 어제의 아버지를, 그의 사랑을. 어느 날 아이와 숲길을 걸으며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너’의 자상한 목소리가 나직나직 들려오는 것만 같다. 존경과 연민의 시선으로 쓴 아버지 이야기.

간만에 그녀의 아버지가 전화하셨다. 휴일 아침이었다. 별일 없느냐는 짧은 안부를 물으시곤 엊그제 집수리를 하는데 아들을 불렀더니 일을 아주 잘하더라는 칭찬을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동생과는 이따금씩 만나 술자리도 하고 그러신다며 용서와 화해의 에피소드를 늘어놓으셨다. 그녀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결국 쌀쌀맞게 말했다. 동생과 구곡폭포에 다녀왔고 젊은 날 아버지의 일탈이 불러온 파탄과 평생 얼룩처럼 남은 상처를 또다시 꺼내 나눈 것이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동생은 아버지의 집수리 얘기를 하지 않았으며, 했더라면 해드리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라고 하자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조금 작아진 목소리에 쓸쓸한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래, 내가 키우진 않았지만 너희들이 잘 커 줘서 늘 고맙게 생각한다. 언젠가 그녀도 동생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빠를 싫어하지만 건강하게 계셔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언제 한번 밥 먹어요.” “그래, 그러자꾸나.”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애쓰는, 아버지가 된 동생과 잘 정돈된 숲길을 걸었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환경에 대해, 아버지의 구김 많은 인생이 보이기 시작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불에 거슬린 듯한 마음의 얼룩은 옅어졌다가 진해지기를 반복했지만 지워지지는 않았다. 저녁에 술 한잔 걸치면 울면서 미안하다고 전화하시는 아버지께 그녀도 묻고 싶었다. 지울 수 없는 얼룩은 어떻게 하나요.

조현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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