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시인)

내가 소싯적에 긴밀하게 지내던 회계사가 있었다. 아주 잘나가는 분이었다. 인간적으로 빈틈이 별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도 친한 척하면서 자주 술을 마셔야 했다. 하루는 그가 이러는 거였다.

회 : 우리 와이프가 이번에 병원을 넘겼어요. (그분의 부인이 개원의였다.)

나 : 어? 병원 잘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요?

회 : 병원은 잘 되는데, 이번에 우리 딸이 중학교를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대학 들어갈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야 해서 6년간 후배에게 넘기기로 결정했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나는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이 되어서 이렇게 대답했다. 네에? 그렇게 해서 결국 젤 잘 되면 고작 서울대 가는 거잖아요?

그는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분노였던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내가 하는 말에 대답을 하진 않았다. 서울대 나온 부모가 단 하나 있는 딸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데 느닷없이 고작 서울대? 라는 말을 들었으니 모욕감을 느낀 것 같기도 했다. 뭐 이런 미친놈이 있지? 이런 표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진심으로 고작 자식 서울대 보내려고 자기 일을 접어? 이랬다. 겨우 서울대? 이랬다. 생각해 보니까 그날 이후로 관계도 좀 더 구체적으로 서먹서먹해진 것 같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때 내가 참 모자란 놈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서울대 안 나오고 사는 사람들은 70 넘어 미쿡 플로리다에 이민 가서 백인 노인학교에 들어간 충북 중원군 엄정면 출신 노인 같은 처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온 사회에 서울대 프리미엄이 당연시되는 게 한국식 공정 아닌가. 서울대도 안 나오고 감히 이력서를 내? 서울대도 안 나오고 감히 시를 써? 서울대도 안 나오고 감히 술을 쏟아? 서울대도 안 나오고 감히 길에 차를 몰고 나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당장 페북 대문만 해도 서울대 나온 애인들은 다 자기 학력을 걸어두고 있다. 서울대 나오고 학력 올리지 않은 사람은 네덜란드에서 남편과 자전거포 하는 내 친구 함미자 밖에 못 봤다. 하도 억울해서 나도, 가을부터 남영동 대진학원에 등록해서 서울대 가려고 맘 먹었다. 이왕이면 법대에 가서 사법고시까지 봐야지. 

그때 서울대 못 알아보고 개무시한 회계사님께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전한다. 아침에 텔레비전에 나와서 서울대 나온 남편 자랑하는 옛날 옛날 애인을 보니까 삶이 조낸 매캐해진다. 아, 그 쇠털같이 많은 날에 서울대도 안 가고 나는 도대체 뭘 했단 말인가. 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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