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큰롤 50년 역사를 빛낸 50 거목들

마빈 게이(Marvin Gaye)

모타운이 배출한 특급스타로 부드러우면서도 중량감 있는 노래를 들려준 인물. 

’60년대에는 여가수와 듀엣 등으로 내내 사랑노래를 불렀으나 ’70년대에 들어 월남전과 흑인현실에 눈을 돌리면서 다른 길을 밟았다. 이와 관련, ’71년의 앨범 <What’s Going On>은 메시지 사운드 모든 면에서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후에는 성적(性的)테마의 노래도 많이 불렀다.

마빈 게이(Marvin Gaye)

1939년 워싱턴 태생으로 침례교 목사인 아버지의 교회에서 노래 부르다가 ’60년 디트로이트로 이주해 이듬해 모타운의 탐라 레이블과 인연을 맺었다. 모타운 베리 고디 사장의 여동생 안나와 결혼. 1984년 아버지와 다투던 중 어이없게도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마지막 히트곡이 1982년에 발표한 <Sexual Healing>. 상기한 곡 외에도 ’68년 <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과 ‘73년의 <Let’s Get It On>은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엘튼 존(Elton John)

’70년대 개막과 함께 혜성처럼 출현해 10년간을 완전 독점한 싱어송라이터이지만 히트행진은 ’80년대와 ’90년대도 관통했다. 70년부터 95년까지 26년 매해 차트 톱40 히트송을 내놓은 신통력(?)을 발휘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23년을 훌쩍 깬 이 부문 신기록. 

엘튼 존(Elton John),

그가 오래도록 정상을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마구 샘솟듯 흘러나온 빼어난 멜로디 제조술 때문. 1947년 영국 미들섹스 태생이며 본명은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 애초 ‘블루솔로지’란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으나 ’69년부터 작사가 버니 토핀과 짝을 이뤄 히트행진의 채비를 갖췄다. 첫 히트넘버 <Your Song>을 비롯해 <Goodbye Yellow Brick Road>, <Bennie & The Jets> 등 하나둘로는 곤란할 정도로 대표곡 리스트가 화려하다.

원래 여배우 마릴린 몬로에게 바친 곡이었으나 ’97년 사망한 다이애나 황태자비에게 가사를 바꿔 헌정한 <Candle In The Wind 1997>는 싱글판매 1100만장이란 신기원을 이룩했다. 이제는 엘튼 존이 아니라 엘튼 존 경(卿)이다. Sir Elton John!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1944년 달라스 태생인 흑인 실베스터 스튜어트(별명이 슬라이 스톤)가 이끈 그룹.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장하면서 히피의 개혁사조에 공감, 사이키델릭한 소울에 정치색과 사회성이 강한 곡을 불렀다. ‘날 검둥이라고 부르지 마. 흰둥이야!’(Don’t Call Me Nigger, Whitey)란 제목의 노래가 말해준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메시지보다 더 영감을 준 것은 리더 슬라이 스톤이 펼쳐내는 변화무쌍한 폴리리듬이었다. 때문에 펑크(Funk)의 원조로 항상 제임스 브라운과 함께 언급되며, 나중에 디스코에도 길을 열어준 ‘리듬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흑인 가수의 경우 단일 곡이 팔릴 뿐 앨범판매는 저조한 관행에도 이 그룹의 앨범은 잘 팔렸다. 

’70년 히트곡 모음집은 판매고 500만장을 상회했다. 하지만 슬라이 스톤은 마약에 찌들어 ’70년대 중반부터는 급격히 내리막길로 빠졌다. 천재는 기인임을 말해주는 사례. 대표곡은 <Dance To The Music>, <Everyday People>, <Hot Fun In The Summertime>.

DJ 최인(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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