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시인)

비가 무섭게 오네. 지금 멀리서 운전하고 오는 사람도 있고 일하러 가는 사람도 있는데 다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붓는다고 한다. 도처에 홍수까지… 가뭄을 걱정한 게 엊그젠데 며칠 사이에 홍수를 걱정하게 되었다. 지구는 확실히 화가 많이 나 있다.

내 머리카락도 화가 많이 나 있다. 백발이 하도 눈부시다고들 해서 그 불편을 좀 줄여줄까 싶어서 요즘 텔레비전 홈쇼핑에서 마구 팔고 있는, 그 흰머리 갈변시켜서 머리를 검게 맹글어 준다는 ‘모냐모냐’ 샴푸를 사서 며칠 사용했더랬다. 아, 그런데 이게 모냐!

머리가 검어지는 게 아니라 붉은 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동묘시장 6천원짜리 염색한 후 색이 바래면 이렇게 되지 싶은데 여기서 멈춰야 할지 더 감아야 할지 갈등이다. 아무튼 하늘도 머리카락도 다 이게 모냐? 이젠 <빨간머리 근>이라 불러다오~ 으으,


살아갈수록 외롭다는 말 - 류근

초등학교 때 친구가 2년만에 전화해서는

어째 살아갈수록 더 외롭냐

이러고는 허허 웃는다

친구는 중학교 마치고 들어간 활석 공장에서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결혼반지도 끼지 못한 채 낳은 첫 아이를 

이름조차 듣지 못한 병명으로 잃었다

나는 짐짓

너 술 마셨구나

술 마시고 운전하면 절대 안 된다

잔소리로 친구의 목소리를 지우려 들지만

이미 엎질러진 목소리는 전화기 안팎을 거스르며

내 안에 묻어두었던 청력에까지 가 닿는다

외롭다는 말

살아갈수록 외롭다는 말

친구는 그 캄캄한 말을 내게 발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마음의 손가락과

부르지 못한 아이의 이름을 견디며 살았던 것일까

살아갈수록 외로워지는 목숨 안에서

살아갈수록 잃을 것만 더 남겨지는 목숨 안에서

또 얼마나 단단해진 한 마디를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외롭다는 말

살아갈수록 외롭다는 말

나는 혼자서 막 깊어진 청력을 견디며

어디 먼 허공에나 대고서 고백하는 것이다

어째서 사는 일은

살아갈수록 더 외로워지는 것이냐

살아갈수록 점점 더 혼자만 남는 것이냐

외롭다는 말

살아갈수록 더 외롭다는 말


들비가 또 새벽 3시 47분에 깨웠다. 비가 온다면서,

들비는 만 10년의 생애를 향해서 그 나이를 치밀하고도 치열하게 살고 있다. 빗소리를 잘 듣는 귀를 자랑하고 싶어한다. 들비야, 좀 나를 잠들게 하... 조용필처럼 말하는 순간에 보면 그는 이미 잠이 들어 있다. 나를 깨워놓고 바로 잠드는 잠버릇을 가지고 있는 개버릇에 대해서, 

시바, 비가 오니 참겠다. 비가 오는데 당신은 어디쯤에 가 계시나.

나는 비 오는 여름날이 참 싫었다. 그 소녀는 노란 원피스를 입고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갔을까. 광화문 박인희의집에서, 까만 음반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면 아아, 비는 푸르고 파랗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하얗게 울지는 말아야겠다고 내 친구 보라색에게 말했다.

하지만 친구는 천천히 느리게 내 눈을 바라보며 고백했다. 나는 보라색이 아니고 사실, 군청색이야. 친구는 암스텔담에서 잘살고 있다고 가끔씩 엽서를 보내온다. 들비는 자고, 비는 내린다.

이런 아침에 나는 최승자 시인을 두 편 읽었다. 인생은 어차피 미쳐 있거나 미치러 가는 곳이지. 비맞은 새들이 흘깃흘깃 운다.


제가 새벽에 깨어나면 우리 동네에서는 여섯 명의 새가 깨어나서 저를 막 반겨줍니다. 저는 그 여섯 명의 새들 목소리를 다 기억해요. 히흩히흩 노래부르는 푸른 새가 제 이웃에 있다는 거슬 꼭 믿어주시길 바랍니다.

겨우 두 문장을 썼는데 막 욕하는 분들이 계시지요. 수준 높은 문장에 대해서는 저도 구스타프 클림트와 토론한 적이 있어요, 아학! 어이쿠! 라고, 그는 슬퍼했지만

지금 스페인에서 문득 걸음을 멈춘 친구의 슬픔과 기쁨 만한 미래가 있을까요? 제가 존경하는 구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 친구는 폐를 앓고 저는 영혼을 앓습니다. 안녕히 더 주무세요. 오늘은 일요일이 맞습니다. 이런 친절한 기억력이라니요. 이러한 친절한 기억력은 어떤가요. 이런과 이러한의 거리. 여름에 피는 꽃들은 다 울음에 겨워있습니다.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