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운순 (강원이주여성상담소장)

며칠 전 12살 k가 엄마와 함께 상담소를 다녀갔다. 외국인을 위한 특수학교에 입학서류를 작성하기 위해서다. 올 초 k를 이민자 자녀로 만나 상담했을 때보다 표정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k는 어머니와 함께 가정폭력피해자로 상담받고 보호시설에 입소한 적이 있었다. 

k는 베트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국제결혼한 엄마의 초청으로 한국에 중도 입국했다. k의 고향은 호찌민에서도 기차를 타고 10시간은 더 가야 하는 곳으로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한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조부모님과 살았다고 했다. 마을 한가운데는 오래된 호수가 있었는데 호수를 지나갈 때마다 신께 빌었다고 했다.

엄마가 어서 와서 k를 한국으로 데리고 가기를…. 그리고 올해 드디어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입학서류 중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였다. 통역을 통해 자기소개서 질문지 문항을 k에게 물었다. 한국의 대안학교에 중도 입학하는 이유가 있는지? 대안학교에 어떤 기대가 있는지?

k가 대답했다. 한국인 새아버지와 형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요. 아버지는 인삼농장을 하는데 가끔 제가 일을 도와드려요. 아버지가 시키는 일들을 더 잘하고 싶어요. 그리고 형도요. 저는 형하고도 잘 지내고 싶은데, 형하고 게임도 하고 싶은데 형은 저와 얘기를 잘 안 해요.

새아버지는 어떠시니? 저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아마 한국문화를 몰라서 일 거예요. 제가 더 노력해야 할 거예요. 

노력이라는 k의 말이 걸려서 다음 질문이 얼른 나가지 않았다. 나는 끝내 k에게 너는 너로서 이미 충분하다고, 더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k와 어머니의 체류비자를 지속적으로 연장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새아버지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새아버지와 잘 지내고 싶은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생존의 차원이었을 것이므로. 

k는 무사히 외국인을 위한 특수학교에 입학했다. 공식적인 노동의 범주 밖에 있던 돌봄·가사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그녀들과 함께 가족결합형식으로 초청하여 한국에 오는 이민자의 가족들에게 한국은 또 하나의 조금 더 나은 대안일 수밖에 없다.

먹고만 살려고 왔겠어요? 더 잘 살려고 왔지!

이주여성의 삶을 다룬 연극 ‘텍사스 고모’에 나오는 대사이다.

탁운순(강원이주여성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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