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일 기자

한 달 전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 마트에 들렀다. 한 여성이 음료수 매대 앞에서 한참 동안 다양한 종류의 음료수들을 이것저것 들었다 놓았다 반복했다. 그의 모습이 의아해서 살펴보니 시각장애인이었다. 

그가 찾는 커피음료를 찾아줬다. 그에 따르면 식료품 등에 점자 안내가 의무가 아니다 보니 시각장애인이 원하는 제품을 직접 골라 구매할 수 없다고 한다. 부끄럽지만 기자도 그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쫓기며 그 일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최근 지역의 예술가들이 시각장애인을 위해 기획한 전시회를 취재하면서 한 달 전 일화가 다시 떠올라 상황을 알아보니 시각장애인이 생활에서 겪는 불편은 무척 심각했다. 한국식품산업협회가 지난해 7월 회원사 161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회원사 154곳이 점자 표기를 제공하지 않았고 점자를 표기한 제품 중에서도 상품명까지 알 수 있는 제품은 단 4개에 불과했다. 식약처 조사에 따르면 현재 자율적으로 점자 표시를 하고 있는 식품은 75개(음료류 28, 주류 41, 면류 6), 건강기능식품 8개뿐이며 음료의 경우 음료와 탄산, 맥주 등으로만 점자가 표기돼있다. 컵라면이나 과자류는 아예 점자표기가 없다. 의약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020년 식약처가 조사한 전체 의약품 4만4천751개 가운데 점자가 표기된 제품은 단 94개로 0.2%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점자로 약의 이름은 표시돼 있다 해도 유통기한이나 효능, 주의사항 같은 핵심 정보는 적혀 있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다.

가장 기본적인 것의 현실이 이러하니 그동안 문화예술 현장 특히 전시회에서 시각장애인을 만날 수 없었던 게 당연하다. 문화기본법에서 문화향유를 국민의 기본 권리로 규정하고 있지만, 장애인의 경우 문화·여가시설, 문화콘텐츠 접근에 어려움이 있어 문화향유 수준이 미흡한 실정이다. 

앞서 말한 전시회를 기획한 예술가들은 전시장에 가면 꼭 마주치는 “만지지 마세요! 눈으로만 보세요!”라는 경고문구가 시각장애인의 문화향유에 커다란 장벽이라 말하며 그에 대한 응답으로 작품을 마음껏 만져도 되는 전시회를 기획했다. 몇 해 전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50주년 기념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촉각 및 청각 자료를 제공한 특별전시회를 진행한 적이 있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시회는 전국적으로 드물고 춘천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그들의 의도가 모든 전시회에서 작품을 만지게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경고문구도 사실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지목했다기보다 비장애인까지 포함해서 작품이 훼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전시회에서 점자 리플렛 등 시각장애인을 위한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가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들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의 어려운 고충을 더 많이 알게 하는 것만 해도 큰 성과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수많은 예술가가 한 사회의 변화를 이끌었듯이 말이다. 

좋은 소식도 들려왔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식품에 점자 또는 음성·수어 영상 변환용 코드를 표시하는 경우 표준화된 ‘식품의 점자 표시 등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배포하여 시각·청각장애인의 식품 정보에 대한 알 권리가 개선될 전망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한국사회 각 영역에 점자표기 법제화를 도입해야 한다. 마트에서 만났던 그가 주변의 도움 없이 편하게 물건을 구입하고 전시회도 즐기는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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