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김용석

평일 점심시간··· 명동 지하상가에바이올린 선율이 꽤 오랜 시간 퍼져나갔다. 연주소리는 귀를 사로잡았고 연주자의 표정은 발길을 멈추게 했다. 생기와 감동과 기쁨이, 묻어났다. 이겨낸 기쁨으로 보였다. 어떤 분일까 절로 궁금해졌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흔쾌히 수락해주셨다.

Q. 안녕하세요. 기존에 어떤 음악인생을 살아오셨는지요?

태생은 서울이지만 경기도권에 지내면서 가르치는 일을 계속 해왔어요. 개인레슨, 학교 방과후교육 강사, 문화센터 강사에 이어 교습소 운영까지 했었습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일을 10년을 넘게 하다가 지쳐가지고요. 전공자들 가르치는 건 재미가 붙을텐데 취미로 하시는 분들 가르치고 아이들 위주의 기초레슨을 반복하니 힘든 거예요. 그러던 중 2009년에 버스킹 오디션 공모가 있어 시작했는데 어느덧 14년이 됐네요. 중간에 코로나 때문에 잠깐 멈칫했지만 온라인 공연으로 이어갔어요. 춘천에 와서는 문화재단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제가 문화재단 사이트를 자주 살펴보고 있었거든요. 뭘 할 수 있을까 하고요. ‘도시가살롱’, ‘생각의 탄생’: 예술가 지원 사업, ‘예술과 동네 한 바퀴’: 교육 지원 사업까지 총 3가지를 해요. 춘천에서 음악활동이 연결되면 좋겠다는 막연했던 기대가 싹터서 나무로 자라났어요. 제가 하던 버스킹과 가르치는 일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찍어줘요. 완전히 정리가 되는 거예요. 

김용석씨(52)와 첫째아드님 김상진씨(22). 상진씨는 춘천에서 젊은 사진작가로 경력을 쌓고 있다. 아버지와 의기투합해 효자동에 작은 공간을 열었다.    사진제공=스튜디오 츠츠

Q. 바이올린은 어떻게 잡게 되셨어요? 자연스럽게 궁금해지네요

초등학교 5학년 때 바이올린을 처음 접했거든요. 12살에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처음 봤어요. 바이올린을 배우는 사람도 전교에 저 하나밖에 없었어요. 제가 이렇게 바이올린을 들고 가면 주변에서 바이올린 켜는 흉내를 냈어요. 이어서 예술중·고등학교와 대학교 학부 과정까지 마치게 됐어요. 그런데 예술고등학교 올라가니까 학교 폭력이 있는 거예요. 그게 심했어요. 남학생이 학년에 20명 남짓 있었으니 소수였는데 그러다 보니 군기문화가 세더라고요. 저는 대학교 올라가서는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더 심해서 깜짝 놀랐어요. 관현악과니까 필수 과목으로 전 학년 오케스트라 시간이 있었어요. 적응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유독 적응을 못 해서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학을 해버렸거든요. 졸업도 오랜 기간이 지나서 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제가 음악에 대한 본질적인 걸 많이 놓쳤어요. 서양 음악문화를 흡수해서 제 것으로 만들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당시에는 하나도 와 닿지 않았어요. 그때 학교를 그만두려고도 했었고 그냥 나는 내 음악을, 대중음악을 하겠다, 나는 그게 맞다는 반발심이 되게 많았었어요. 사실은 어느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거죠. 제가 안 했던 거예요. 다만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명목을 갖다 붙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엔 제가 전공한 음악들이 귀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양 음악이야. 그래서 심지어 민족 음악 동아리 들어가서 데모를 따로 나가기도 했어요. 반발심이죠.

Q. 무엇을 시작하실 때 그런 본인의 마음이 많이 중요하신 분 같아요. 시작함에 앞서 스스로에게 확실하게 의미 부여가 되어야 하는 점이요.

저는 한 번도 정규직으로 일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안정적인 수입이 없었던 거죠. 돈을 보고 일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정말로, 마음이 닿는 일을 했었던 것 같고 지금은 하고 있지 않지만 네이버카페 활동도 되게 열심히 했었거든요. 바이올린 관련 카페를 운영했었어요. 회원이 3천 명 정도까지 있어서 검색하면 제법 순위 안에 나왔었어요. 카페운영을 2004년에 시작했는데 중간에 개인적으로 좀 힘든 시기에 활동을 잠깐 접은 기간 빼고 통산 10년 넘게 운영을 했죠. 모여서 합주도 하고요. 정모도 있었고 세미나도 열곤 했어요. 공개 레슨도 했었네요. 그러니까 돈 안 되는 일에 제법 열심히 임했던 거죠. (웃음) 바이올린 기본교재로 스즈키 교재가 있는데요. 1권부터 7권까지 제가 다 연주해서 카페에 올려놨어요. 카페 활동은 안 하셔도 그것만 보시고 오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교습소도 2년간 운영하다가 2009년부터 버스킹을 시작했어요. 거리 음악을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사실 이걸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버스킹 수입으로 기부를 상당 부분 했어요. 스스로 기부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기도 했었고, 네이버 콩을 활용해 온라인 카페에서는 그걸로 기부에 동참하고요. 

Q. 주로 서울에서 버스킹을 하셨다고요. 2020년에 춘천에 오시게 된 결심이 궁금하네요.

사실은요, 제 아들 얘기를 안 할 수 없는 게 녀석이 유튜버예요. 이 친구가 10만유튜버 된 지 1년이 넘었어요. 아들이 성인이 된 시점에 코로나가 퍼졌어요. 여행 작가가 꿈이기도 하고 유튜버 특성상 돌아다니며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데 못 하게 된 거예요. 아들이 한 달인가를 방에 들어가서 뒹굴뒹굴하더니만 갑자기 시골에 내려가서 살겠다는 거예요. 우연히 찾게 된 집이 춘천 송암리였어요. 그러면 거기서 뭘 할 수 있느냐, 고민했던 거죠. 게스트하우스를 하자니 사업자등록증 등 절차가 있어서요, 아들이 컨셉을 시골 살기로 잡은 거에요. 제가 아이디어를 더했는데 그럼 네가 돈을 받지 말고 게스트하우스를 해라. 원칙상 네가 수익이 나면 안 되니까 이용자들에게 받은 숙박료를 기부하라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기부하는 상진 여행집이라는 걸 만들었고(아들 이름이 김상진) 대박이 난 거예요. 처음에는 대박이 났고 구독자들이 놀러 오는 거죠. 제가 이제 도와준다고 집에서 왔다갔다 하며 보니까 이곳이 너무 좋은 거죠. 그래서 이사를 결심했어요. 지금은 송암리를 정리하고 효자동에 스튜디오를 차렸어요.

Q. 공연하실 때 보니까 바이올린 연주에 비트 박스도 넣으시고 전자효과를 활용하시던데 어떻게 도입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공연 때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게 된 것 때문에 비트나 전자효과 도입을 시작했거든요. 되게 재밌는 점이요, 제가 쓰는 루프가 특정 비트가 반복되는 형태잖아요. 오히려 그 반복을 활용해 기존 레퍼토리를 탈피했는데요, 반복이 도구가 된 거죠. 이걸 깨닫고는 깜짝 놀랐어요. 처음에는 비트를 깔고 마음 가는 대로 즉흥연주를 했어요. 그러니까 얼마 안 듣다가 다들 가버려요. 추상적인 거죠. 사람들이 아는 걸 해야 되는구나 느꼈죠. 루프 페달을 활용한 에드 시런(Ed Sheeran)의 Shape of you라는 곡을 자주 연주하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관객분들은 그 곡을 좋아해요. SNS에서도 반응이 좋더라고요. 사실은 제 자작곡만 하고 싶고 페달 누르면서도 그냥 말도 안 되는 저의 음악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분명히 한계가 있고 공연을 위해서라면 그 루프 페달을 사용하더라도 뭔가 전해질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내 보자고 다짐했죠. 

Q. 연주의 초점이 나에게 있는가, 타인을 위함인가를 논하자면 오롯이 어느 쪽에 속하는 건 어려운 것 같아요. 요즘은 본인이 선호하시는 음악과 청중을 고려한 음악, 그 사이 어느 지점에 있는 것 같으세요?

그 부분에 대해 저도 늘 질문을 해 왔었는데 기존의 저는 공연이 곧 예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하지만 결국엔 예술적 서비스였던 거예요. 제가 초점을 잘못 맞췄던 거죠. 그 예술적 서비스라는 것과 예술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할 수 있겠다 싶어요. 퍼포먼스는 딱 퍼포먼스로 두면 되는데 거기에 너무 자아실현이나 궁극적인 것을 다 담으려 하면 고뇌에 또 빠지게 됩니다. 앞으로는 루프 페달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도망가는 곡을 연주할 일은 없다는 거죠. (웃음) 여태까지는 그러한 갈등 속에 스스로를 괴롭혀왔던 것 같아요. 이제는 구분된다는 점이 저는 너무 좋아요. 그래서 아까 춘천에서 출발점에 놓인 것 같다는 의미가요, 다시 시작하는 거죠. 어찌 보면 기존에도 아예 인식하지 못하던 내용들은 아닌데요,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건 다른 것 같아요. 확실히요.

Q. 음악인으로서 이루고 싶은 부분이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그리시는 청사진이 궁금합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학창시절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시간이 있었어요. 제가 어떻게 말했냐 하면 이 얘기 들으면 되게 웃기실 거예요. 저는 우리나라 음악계에 뭔가 기여하는 싶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외쳤어요. 지금 돌이켜봐도 제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친구들이 그걸 듣고 박수는 왜 친 걸까, 의아한데요. 저는 그게 마음에 남더라고요. 잔상처럼. 당장 수입도 불안정하고 먹고 살기도 힘들 만큼 그런 와중에 있었을 시절에도 마음에선 그 어릴 때의 목표가 남아있는 거예요. 저의 초심이었을까요? 서울에서 거리 공연을 해서 공연비를 받기도 했는데, 상당 부분 기부했어요. 진짜로 순수한 마음으로 했던 것 같아요. 저는 향후에 그렇게 갈 것 같아요. 네이버 카페에 올렸던 그 스즈키 바이올린교재 연주영상도 나중에는 유튜브에 공유했었어요. 이런 식으로 저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많은 이들한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할 거에요. 음악활동 방향은 아무래도 창작, 교재출판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겠는데요. 창작으로는 디지털 싱글 같은 걸로 이제 작업을 해나갈 것 같아요. 가르치는 일과 제가 하고 싶었던 작업들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이 될 거에요. 교재는 몇 년 전에도 출판사랑 얘기는 되었다가 무산된 경험이 있어요. 완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재도전할 예정입니다. 제 일이 프리랜서이다 보니까 수입원으로 역할을 해주면 좋겠고요. 지금 참여하고 있는 사업들만 해도 참 행복감이 듭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이 생겼어요.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저를 블록 끼워서 맞추듯이 탁탁 다시 저를 재조립한달까요? 내가 제대로 이번에는 제대로 뭔가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루하루가 기대되는 나날이에요.

최근에 TV 프로그램 인터뷰에서도 “춘천이 너무 좋다. 저에게 축복의 시간을 주고 있다”고 얘기한 김용석씨. 춘천 주민으로 지내는 동시에 아직은 여행자모드로 춘천을 관찰하고, 즐기고, 연구하는 중이라고. 문화예술의 도시 춘천에서 음악인생 제2악장을 열며 음악인으로서 지역사회에 어떻게 기여할지 더불어 고민하는 모습에서는 고향사람과 같은 정이 보였다. 춘천 곳곳에서 음악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려주시길, 절로 응원하게 된다.

이상화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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