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정 (시인)

“아빠도 그랬지만 무엇이 빨리 되고 싶다거나, 무엇을 빨리 이루고 싶다는 건 욕심이야. 암만 뛰어도 우리는 고작 두 굽이만 빨리 온 거야. 걸어야 할 땐 걸어야 하는 게 우리 삶이야. 아빠도 할아버지도, 그리고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도 수없이 이 고개를 넘나들어도 너처럼 한 번 뛰어서 이 고개를 넘지는 않았을 거다. 그분들은 오래 가야 하고 또 오래 걸어야 할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를 알았으니까. 이런 고개를 넘을 땐 천천히, 그리고 뚜벅뚜벅 걷는 게 가장 확실하다는 걸 말이지. 뛰고 싶은 걸 참는 것도 지혜인 거야.”

이순원 장편소설 《아들과 함께 걷는 길》. 2011년 작. 이 소설을 십 년이 훌쩍 지나서야 읽게 되었으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삿포로의 여인》 속 마가목 하얀 꽃향기가 그렇게 오래 코끝을 간질이더니 이어 대관령 옛길 굽이굽이 우뚝 선 푸른 나무 같은 이야기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게 한다. 소설 말미, 멀리까지 마중 나온 작가의 아버지가 손자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기어이 눈물이 핑 돌았다. 작가는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큰아들 상우와 대관령 고갯길을 걸어 넘으며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독자는 앞서가는 작가 아빠와 작가를 쏙 빼닮은 아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서른 일곱 굽이를 함께 돌아 내려온 것처럼 생생한 문체에 빠져든다. 여덟 굽이를 돌며 일러주는 ‘나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려는 작가의 마음, 스물여섯 굽이에 이르기 전에 생각해 보는 ‘조급함에 대하여’, 아버지의 ‘물푸레나무’와 ‘노란 손수건’, 백년도 넘는 ‘우정’에 대한 이야기는 굽이를 돌 때마다 어른의 세계에서 각박하게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한동안 잊고 지내던, 혹은 잃어버렸던 순수를 다시 찾아줄 것만 같다. 주변의 모든 예비 부모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소설책.

저녁을 먹고 달맞이꽃이 환한 공지천 수변길을 걸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아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오래 걸어야 할 길을 걷는 법과 뛰고 싶은 걸 참는 지혜를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삶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겠다고 하자 아들이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뛰지는 말고 속도를 좀 내시는 게 좋겠어요!” 하여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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