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최성각’을 처음 만난 건, 강릉 남대천 변에서 1975년 단오제가 열리던 때다. 그 이전에 박기동 시인이 삼척에 있는 내게(삼척중학교에서 국어 교사할 때다) 놀러 왔다가 최성각을 한 번 만나보도록 부탁했었다. 이런 말과 함께.

“형님. 제 강릉 후배 중에서 가장 열심히 문학을 하는 후배가 최성각입니다. 형님처럼 소설을 쓰니까 만나서 얘기 나눠보면 잘 통할 겁니다.”

그래서 나는 강릉 가서 최성각을 만났다. 구체적으로는 단오제 행사가 한눈에 보이는, 어느 건물 2층의 술집에서 만났다. 강릉 단오제는 강릉뿐만 아니라 삼척 묵호 옥계 양양 속초 주문진 등 온 영동지방의 주민들이 즐기는 큰 행사다. 내 고향 춘천에서는 생각도 못한 그 거대한 행사를 구경하며, 최성각과 막걸리를 마시며 문학 얘기를 오래 나눴다. 첫 만남인데도 우리는 얘기가 잘 통했다. 

얼마 후 최성각은 나와 박기동 시인이 있는‘그리고 동인’에 가입됐다. 이듬해 정초다. 최성각은 강원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으로써, 선배 그리고 동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창 젊은 20대 때 그렇게 만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세월 탓일까, 각자의 인생행로가 다른 탓일까, ‘그리고 동인’도 해산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나는 문학의 뜻마저 접고 교직 생활에 전념했다. 최성각과도 더 이상 만나보지 못하는 채로 세월이 흘렀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최성각과 재회한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2020년 7월 어느 날 밤에 춘천 서면에 있는 나비야게스트하우스에서 재회한 거다. 사실 그 이전에 박기동 시인한테서 ‘최성각이 서면에 은둔하듯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귀띔으로 들었었다. 다른 데도 아닌 춘천 서면에 살고 있다니 전화라도 한 번 걸 법했는데 왠지 나는 그러질 않았다. 대신 ‘같은 춘천에 살고 있다니 만날 날이 올 거다’라고 마음 정리를 했다. 반세기 넘어 이순을 넘자 20대 때의 혈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까? 그 까닭을 한 번 구체적으로 글로 살피면 단편소설 한 편은 나올 예감이다. 

어쨌든 춘천 서면의 나비야게스트하우스에서 우리는 반세기 가까운 세월 만에 재회했다. 그 또한 작정하고 재회한 게 아니라 ‘네팔에 가서 산다는 김규현 거사가 모처럼 춘천 서면의 나비야게스트하우스에 온다는 얘기를 듣고는 만나보러 갔다가’ 우연히 최성각까지 만난 거다. 처음에는 최 작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 모습들이 변해서 몰라봤다가 뒤늦게 알아챈 거다. 정말 글로 쓰면 단편소설 한 편 나올 법한 장면이다.

“형님. 저희 집에서 자리를 마련할 테니까, 옛날의 그리고 동인들이 모입시다. 모여서 막걸리 마시며 지난 얘기 한 번 밤늦도록 나눕시다.”

“좋지.”

그랬는데 얼마 후 코로나 사태가 본격화되면서 … 수포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최성각 작가와의 만남 얘기는 제대로 써서 단편소설로 남겨야 할 것 같다. 


최성각

소설가이자 환경운동가. 주요 작품으로‘잠자는 불’‘택시 드라이버’‘부용산’등 다수이며 2009년 현재 ‘풀꽃평화연구소’ 소장이자, ‘녹색평론’편집자문위원이다. 

 

‘춘천 문인들’ 연재는 이것으로 일단락 짓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4~50년간 인연이 있는 춘천의 원로 문인들을 연재의 대상’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13회로 일단락 지은 겁니다. 

언젠가 ‘춘천 문인들 제2편’이란 제목으로 연재할 날이 올 거라 믿으며 그때를 대비해 춘천 문인들에 대한 얘기들을 부지런히 모으렵니다.

다음 회부터는 ‘내 젊은 날 춘천에는’이란 제목의 글이 연재됩니다. 반세기 전 춘천 풍경, 특히 춘천 젊은이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듯 써나갑니다.

이병욱(작가, 춘천문인협회 회원)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