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후명 소설가

윤후명 소설가는 1946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되어 등단하여 《70년대》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79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산역山役〉이 당선되어 창작의 폭을 넓혔다. 시집 《명궁名弓》, 《홀로 가는 사람》,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등이 있고, 소설집 《둔황敦煌의 사랑》, 《부활하는 새》, 《원숭이는 없다》, 《귤》, 《여우 사냥》, 《가장 멀리 있는 나》, 《새의 말을 듣다》 등과 장편소설 《별까지 우리가》, 《약속 없는 세대》, 《협궤 열차》, 《삼국유사 읽는 호텔》 등이 있으며, 그 외 산문집 《꽃》,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장편 동화 《너도밤나무 나도밤나무》 등이 있다. 《둔황의 사랑》, 《원숭이는 없다》 등은 프랑스어, 중국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됐다. 녹원문학상, 소설문학작품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수문학상, 김동리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연문인상 등과 3.1문화상 예술상을 수상했다. 

윤후명 소설가는 시와 소설을 아우르는 오랜 창작 활동을 통해 언어의 심미성, 절대 자아의 추구, 독보적인 개인 주체의 발견 등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냈다. 그 결과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김유정 문학촌 개관 20주년 ‘대한민국 문인 아카이브’ 사업으로 전석순 작가(김유정 문학촌 멘토 작가)와 기자는 윤후명 소설가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Q. 올해 등단 55주년입니다.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오신 원동력이 무언가요?

‘죽을 때까지 써야겠다’라는 욕심 때문입니다. (웃음) 외국 작가 중에는 죽을 때까지 쓴 사람이 꽤 있어요. 심지어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헤밍웨이는 죽는 날 아침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도 그 아침에 글을 쓰고 갔단 말이죠. 

내가 77살인데 6~70대 한창 더 쓸 수 있는 나이에 글쓰기를 그만둔 사람이 꽤 많아요. 정 힘이 없어서 그런 거면 어쩔 수 없지만, 건강이 괜찮은데도 그냥 안 쓰는 건 의문이에요. ‘살아있으면서 왜 쓰지 않냐?’라고 묻고 싶어요. 

문학은 삶이고 숨 쉬고 살아있는 기록인데, 문학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잘못 생각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우리 사회가 달라져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을 젊었을 때부터 해왔어요. 생각하면 죽는 날 아침에도 쓸 수 있을지는 참 어려운 점인데 ‘그래도 해봐야겠다’, ‘끝까지 계속해 보자’ 지금도 변함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선생님 삶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어떤 문화가 있나요?

고등학교 시절 서울로 이사 와서 처음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학원》이라는 잡지를 보니까 내 또래들이 글을 쓰고 있더라고요. 놀라웠어요. 나는 꿈도 못 꿨었죠. ‘아! 이런 세계도 있었구나’ 하면서. 아주 급격히 빠져들어서 고교 2학년 때는 학교 대표로 성균관대학교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했어요. 잘 모르니까 좋은 작품을 그저 열심히 베끼면서 문학에 빠져들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것을 작품이라고 하기엔 망설여지긴 하지만 하여튼 열심히 끄적이고 여러 곳에 보내기도 했어요. 그래서 대학 2학년 때 3학년 올라가면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남들보다 빠르게 데뷔했습니다.

법관 같은 성공의 길을 접어두고 문학을 하니까, 법관이신 아버지는 아주 싫어했어요. 회초리를 들며 끝까지 허락을 안 했어요. 등단했는데도 소용없었죠. ‘문학은 패배자의 것’, ‘법은 승리자의 것’이라는 거죠. 사회적으로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법을 해라’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었어요. 그렇지만 이미 문학에 빠져들어서 헤어날 수 없었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글을 쓰네요. 

Q. 김유정문학촌에서 문학상담을 받는 청소년 중에도 같은 고민을 하는 학생들이 많은 걸 보면 한국에서 글을 쓴다는 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바칼로레아 같은 프랑스 시험 제도도 어떤 답을 내는 게 아니라 자기 논리를 펼치는 글쓰기이에요. 글쓰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건데 한국은 그런 시험을 하지 않아요. 우리 시험은 맞추기만 하지 무슨 논리가 필요합니까? 그러니 아직도 그런 교육을 할 수 없어요. 이게 아주 참 문제입니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를 예로 듭시다. 그 친구는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서도 서울법대 시험을 치겠다며 선생님께 원서를 써달라고 했어요. 기가 찬 선생님은 당연히 안 써줬죠. 세월이 흘러 친구가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었는데, 졸업한 지 50년이 되어 동창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식을 들었어요. 놀랍게도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로 정년퇴직했다는 겁니다. 사실 문예반이었던 친구가 에세이를 참 잘 써서 예일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꿈도 못 꾸는 세계예요.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봐야 해요. 언제 바뀔까요? 

Q. 선생님은 시와 소설을 아우르는 본보기입니다. 하지만 고민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내가 시인으로 먼저 등단해서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 시리즈 중 처음 묶음으로 1977년 5월에 첫 시집 《명궁名弓》이 나왔어요. 그런데 나중에 소설가가 되어 이어령 선생께 인사 갔을 때, 앞으로 소설을 쓰려면 ‘시를 버리라’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당신께서 수필, 시, 소설 다 쓰고 웬만해서는 다 1등인데, 1등 여러 개를 합치니 되려 평가가 안되더라는 겁니다. 여러 개 다 두각을 나타내니 결국 안 알아준다는 거에요.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네 하나만 하게”, 그 말씀대로 20년 동안은 소설만 썼어요.

하지만 시인이 소설 썼다고 흠이 되는 것 우리 문학을 위해서도 변해야 합니다. 외국에는 안 그래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소설 《말테의 수기》를 썼듯이 시와 소설 같이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시와 소설 한 가지만 합니다. 둘을 하면 손해를 봐요.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열린 사회가 아니에요. 나이를 이렇게 먹었으니 그거라도 좀 바꿔놔야겠다 싶어서 지금은 같이 씁니다. (웃음)

윤후명 소설가의 육필원고

Q. 작품에 등장하는 강릉이나 중앙아시아의 풍경들, 선생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강릉에서 태어나 여덟 살까지 살았는데 토막토막 남은 기억 속 고향을 안 쓸 수는 없었어요. 또 강릉은 함경도와 산맥을 타고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풍토가 같고 또 중앙아시아로 연결됩니다. 그 속에는 한때 세계를 호령한 몽골족의 세계와도 맞닿아 있어요. 그래서 그런 세계와 우리가 맞닿아 있음을 쓰고 싶었어요. 《둔황의 사랑》을 그래서 썼습니다.

둔황(敦煌)은 중국 간쑤성에 있는데 중국하고 또 달라요. 여러 민족이 다 섞여 있고 불교, 기독교 다 있어요. 혜초가 갔듯이 우리와 전 세계로 연결되거든요. 그걸 한번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면이 없던 시절에 우연한 계기로 쓰게 되었지요.

Q. 많은 작가가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소설 쓰기를 어떻게 가르치시나요?

아마 한국에서 이렇게 소설을 가르친 건 처음일 겁니다. 어떻게 가르칠지 몰랐던 거죠. 그런데 사실 소설을 가르쳐보면요. 수업에 드나들기만 해도 늡니다. 오가며 소설을 생각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게 공부가 돼요. 그런 면에서 아주 좋은 책을 자기 서가에 놓으면, 읽지 않아도 꽂아놓는 것만으로도 자기에게 온다는 괴테의 《시와 진실》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게 바로 가르치는 거죠. 소설은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가르칠 수 없어요. 있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마음대로 써라, 오며 가며 스스로 소설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Q. 이 시대에 작가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외국인을 지하철에 태우고 종점까지 가는 동안 실험을 했는데, 도착해보니 그들이 가나다를 읽더라는 겁니다. 이동하는 동안 배운 거예요. 이건 세계적으로 없는 일입니다. 이 중요한 것이 우리한테 덜 알려져 있어요. 영어가 왜 그렇게 횡행하는지 몰라요. 뭔가 잘못하고 있어요. 우리가 반성이 부족해요. 작가들이 한글에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문학을 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특별한 계획이라기보다 어떻든 시와 소설을 조금 더 같이 쓰려고 합니다. 소설 쓰는 사람이 시를 못 쓰고, 시 쓰는 사람이 소설을 못 쓰고, 문학에서 무슨 전공 무슨 전공 딱 구분 짓는 그런 풍토는 고쳐져야 합니다. 참 아쉬운 점이에요.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다리를 더 놓으려고 합니다.

정리 박종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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