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통한 18세기 19세기 춘천 시·공간 여행

고문서란?

사람이 사회생활 하면서 인간관계를 맺게 되고 이와 동시에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고 그 일을 해결하거나 정리하기 위하여 문자로 적어 두는 오래된 문헌자료가 바로 고문서다. 

문서는 글로 이루어진 모든 문헌을 뜻하기도 하지만, 통상 고문서는 발급자와 수취자 간에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주고받은 오래된 문서를 뜻한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문서를 주고받는 목적으로는 명령 · 훈유(訓諭) · 임명 · 건의 · 청원 · 소송 · 통지 · 계약 · 증여 · 공증 등 사람이 살면서 겪는 다양한 일들이 포함된다. 

유서 諭書 諭江原道兼防禦使春川府使丁道復

고문서가 희귀한 춘천

고문서가 없는 춘천엔 참으로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춘천에는 춘천향교를 비롯하여 문암서원과 도포서원 구봉서원 등의 교육 기관이 있어 성현에 대한 존숭과 사람됨의 교육을 꾸준하게 이어온 교육의 도시이다. 그러나 한국전쟁(6·25)을 겪으며 도시는 파괴되고 관공서에 공문서까지 모두 불타고 마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러한 이유로 춘천 관련 고문서를 구경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고문서를 만나기 어렵다. 춘천에 뿌리를 내리고 대대로 살아온 명문 가문을 제외하면 고문서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현식이 수집한 고문서

소설가 김현식은 춘천 관련 고문서만 수집한 것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차상찬이란 걸출한 춘천인을 발굴하여 차상찬 관련 모든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김현식 수집 소장 고문서를 분류하면, 한시 관련 25건, 편지글인 서간 20건, 토지거래 후 작성하는 명문(明文) 42건, 다섯 집을 하나의 통(統)으로 묶어 주민을 다스리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따라 작성된 호구단자(戶口單子) 31건, 분쟁이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작성한 소송(訴訟) 단자(單子) 7건, 기문(記文) 1건, 정부의 공식 명령서인 교령(敎令)류 13건, 일반인이 관공서에 올리는 상서(上書) 등의 고문서 29건으로 총 168건이다. 168건 모두 춘천 관련 문건은 아니지만, 150건 이상이 분명하게 춘천과 연관되어 있으며 나머지 문건도 간접적으로는 춘천과 잇닿아 있을 개연성이 높다.

 교지 丁道復 通政大夫行春川都護府使(1714년 강희56 6월)

고문서 분류별 특징

1. 한시(漢詩)

한시는 25건으로 이 가운데 조선 후기 명신으로 1776년 강원 감사를 지낸 김이소(金履素, 1735~1798)가 왕에게 바친 시가 눈길을 끈다. 성품이 묻어나는 깨끗한 글씨에 격조 높은 시어가 매혹적으로 다가선다. 소장 한시에는 여러 명이 시회(詩會)를 열고 연작시를 묶은 시축(詩軸)이 4건이나 된다. 이 가운데 인명을 아직 밝히지는 못했지만, 점헌(點軒) 봉음(鳳陰) 두남(斗南) 충암(衷菴) 수졸암(守拙菴) 해운(海雲) 수암(壽巖) 낙수헌(樂水軒) 노미(老味) 등이 수암속회(壽巖續會)를 열고 ‘선先 편篇 연年 연延’ 자(字) 운자에 맞추어 연작시를 짓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 이채롭다. 4건의 시축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춘천인이며 비슷한 시기에 쓰인 것으로 볼 때 조선 후기 춘천의 문학적 분위기를 가늠하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 서간(書簡)

편지글인 서간(書簡)은 20건으로 조선 후기 화서학파를 이끌었던 류중교 류중악 김평묵 등이 보낸 편지와 성진령(成震㱓)이 춘천부사를 지낸 이원조(李源祖)에게 보내는 편지, 춘천 효자 박주국 일가 관련 편지도 여럿 보인다. 이 가운데 박주국(朴柱國) 아들 희삼(凞三)과 혼인한 사돈집에 보내는 답례 편지는 이목을 끈다. 여기에 글쓴이 미상의 한글 편지는 낯설면서도 정감이 간다. 편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 지역 생활 풍속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3. 명문(明文)

 명문(明文)은 토지 따위를 거래 후 그 권리나 자격, 사실 따위를 증명하거나 명백하게 확증하려고 작성하는 문서다. 김현식 소장 토지 매매 명문(明文)은 42건으로 경북 예천 지역 명문 1건을 제외한 41건이 모두 옛 남면 지역(현재는 춘천 남면과 남산면 지역)에서 작성되었다. 명문 작성 시기는 1708년을 시작으로 1916년까지로 208년간(間)의 기록이다. 특히 남면 사동(寺洞:일명 절골로 지금의 가정3리 지역) 지역에 20건, 추곡(楸谷:일명 가래울로 현 추곡리 지역) 지역에 13건으로 가장 많다. 이 안에서도 추곡 유대(柳垈谷:일명 유텃골)에 8건, 사동 재궁곡(齋宮谷)에 7건이 집중되어 있으며, 이 밖에도 사동(5건) · 사동 집시곡(3건) · 사동 텃골(5건) · 배음곡(2건) · 가지골(2건) · 서사리(西士里 1건) · 소지골 송만리(1건) · 추곡(1건) · 추곡 돌모지(3건) · 추곡 솔만이(1건) 등이 있다. 이 명문은 시기별 지가(地價)의 변천과 그 매매 요인이나 동향을 추적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사노(私奴)가 토지 매매에 관계되는 문건이 상당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춘천지역의 신분 변동과 부(富)의 재분배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가치 높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4. 호구단자(戶口單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따라 작성된 호구단자(戶口單子)가 31건이며 여기에 분쟁이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작성한 소송(訴訟) 단자(單子)도 7건이나 있어서 단자(單子)는 모두 38건이며 대부분 관인이 찍혀 있는 준호구(準戶口)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호구단자는 경기도 파주목 관련 1건을 제외하면 30건이 춘천지역 호구단자로 1759년부터 1876년까지로 117년간의 기록물이다. 호구단자 중 21건이 지금의 서면 지역에 관계되며 반송리(盤松里 현 월송리 지역)가 14건으로 가장 많으며, 권산리(權山里 현 서상리 지역) 5건 수정리(水井里 현 월송리 지역) 1건, 오매리(梧梅里 현 신매리 일대) 1건이다. 현 사북면 신포리(新浦里) 1건 현 시내 대판리(大板里 현 조운동 일대) 1건, 남내면 삼천리(三川里: 현 강남동 삼천동) 6건, 동면 사기촌(沙器村: 지역 확인 필요) 1건이다. 신포리 1건은 권산리 거주자가 이주하여 간 것이고 오매리 1건 또한 권산리 거주자가 이주하여 새롭게 작성된 호구단자이다. 이 호구단자를 통해 특정 가문과 한정된 지역이기는 하지만 춘천지역의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호구조사 실태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가구의 구성 중 사노비의 변화 양상을 추적하여 신분 구성 변화를 살펴보고 특정 지역의 인구수를 가늠할 수 있는 주요한 지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춘천 시내 대판리 관련 호구단자는 희소성이 있는 문건이라는 점과 시내 쪽 인구수와 신분 구성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5. 교령(敎令)

정부 문서인 교령(敎令)류는 13건으로 교지(敎旨) 4건, 칙명(勅命)이 4건, 유서(諭書) 2건, 영지(令旨) 3건으로 분류된다. 춘천도호부사를 지낸 정도복(丁道復, 1666~1720) 관련 문건이 7건이고, 춘천부사를 지낸 이집(李鏶, 1625∼1691) 관련 문건이 2건이며, 기타 인물 관련 문건이 4건으로 모두 칙명(勅命)이다. 정도복(丁道復)과 이집(李鏶)에게 춘천부사를 명하는 교지(敎旨)와 그 임무를 부여한 유서(諭書)가 짝을 이루어 수집되었다는 점에서 문서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고 춘천시의 위상 정립에도 의미가 있다. 

6. 일반 고문서 - 상서(上書) 행장(行狀) 가장(家狀) 시권(試卷) 

일반인이 관공서에 올리는 상서(上書)와 관원이 상급 기관에 올리는 첩정(牒呈), 가문(家門)의 중요한 인물이나 내력을 기록한 행장(行狀) 등의 고문서가 29건이다. 이 가운데 주요한 문서로 가문의 내력이나 인물을 기록한 행장(行狀)과 가장(家狀) 2건이 있고, 춘천 삼대 효자 영암 밖씨 집안의 포창(褒彰)을 요청하는 연명(聯名) 상서(上書) 16건이 있다. 이는 1797년을 처음으로 1799년 1801년 1804년 1817년 1818년 1823년 1830년 1832년 1834년 1835년 1838년 1850년 1851년(3회)까지 16회 55년간 진행된 최장기간 버러진 상서다. 이 16회에 달하는 연명 상서는 춘천인의 자랑거리를 끝까지 세상에 알리고 관철하려는 불굴의 춘천 정신이 돋보이는 사건이다. 이외에 희귀(稀貴) 문건으로는 도창(都倉) 지붕에 이엉을 얹고 이를 계산한 기록(都倉廳直家盖草價査推記), 춘천 효자 집안의 박세영 · 박내영 형제의 과거시험 답안지인 시권(試券) 2건,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청천강에 이르러 강을 건너지 못하자 강을 건너 헤엄쳐 배를 구해 와 선조를 위기에서 구한 송의(宋檥)의 행장(行狀)과 삼대 효자로 세상에 알려져 『이향견문록』 효자 조에 기록된 박주국(朴柱國)이 작성한 영암 박씨 가장(家狀)인 「증조고가장초(曾祖考家狀草)」 등이 흥미를 끌며 이목을 집중시킨다.

 교지 丁道復 通政大夫行春川都護府使(1714년 강희56 6월)

김현식 소장 168건 고문서의 가치와 의의

김현식 소장 고문서 대부분이 춘천 관련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인정된다. 특히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빈약한 춘천 지역사 연구의 사막 속 오아시스와 같은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고문서는 춘천지역의 18세기와 19세기 춘천 사회 경제 문화사 연구에 주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19세기 전반에 걸쳐 신분 구성과 토지 소유 변화 양상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된다. 또 춘천 관련 희귀 자료가 다수 있어서 춘천다움과 다른 지역과의 다름에 한 발짝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춘천 지역민에게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추기

앞으로 2회에 걸쳐서 앞서 개괄한 고문서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설명을 달아서 지역 미시사(微視史) 연구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께서 많은 관심과 격려가 있기를 기대한다.

허준구 (문학박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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