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머물다 간 자리

골목길 대추나무에 대롱대롱 영글어 매달려 있는 대추를 보면서 바쁘게 살아왔던 나를 보게 되었다. 한 해 바쁘게 움직여야 수확철 튼실한 대추를 거둘 수 있는 본연의 임무를 완성이라도 하듯 가느다란 줄기 하나 의지한 채 붙어 있는 대추가 그지없이 기특하기만 했다. 큰 줄기에 붙어 있으면서 간간이 붉은 기가 맴돌며 탐스럽고 먹기 좋은 모습으로 영글어 있는 대추가 우리 인생의 삶을 말해주는 듯하다. 줄기줄기 벌레들이 보이나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과 맛을 지켜내고 익어가고 있는 대추가 제법 보기 좋고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대추의 저마다 모습에서 인생이 들여다보이는 요즘, 아마도 내 인생의 열매들이 지금쯤 익어가고 있는 계절과 맞닥뜨리며 나만의 뒤돌아봄이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 내 모습과 위치는 어느 정도 영글어 가고 있을까? 되물어 보게 되는 계절을 마주했다.

우리는 누구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도 전에 달려야 하는 법부터 배웠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그렇게 여기에 와 있다. 

40여 년 만에 실로 오랜 세월을 지나 초등학교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났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옛 모습들이 남아 있어 금세 어릴 적 추억 속으로 쑤욱 들어갈 수 있었다. 성인의 옷을 입고 앞에 앉아 있는 우리들 사이로 하나둘 어린아이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게 다 큰 것마냥 아이들이 개폼 잡으며 으시덕거리던 모습들, 선생님의 작은 심부름이라도 하려고 주변에서 맴돌던 모습들, 비 온 뒤 물이 고여있는 넓은 운동장에서 마냥 뛰어놀던 모습들…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추억들이 40년을 넘나들며 소환되었다. 그중에 한 친구가 선생님께 맞은 기억을 내놓아 선생님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며 한바탕 웃기도 하였다. 

지금은 교내폭력이다 인권이다 핸드폰을 들이대며 촬영할 법도 하는 장면들이 기억 속에서는 아픔과 고통이 아닌 그리움과 애틋함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풋풋한 마음으로 첫 부임지를 맞이한 제자들을 향한 선생님의 첫사랑이었을까? 열정과 소명이었을까? 반 학생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기억하며 안부를 묻는 선생님의 기억 자락을 통해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건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일상의 기억들이 그리움으로, 감사함으로 마음에 기억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에서 떨어지지 않는 첫사랑처럼 어릴 적 형성된 대상과의 애착의 이끌림이 이곳으로 모이게 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의 이름조차 생생하게 안부를 묻는 선생님의 기억 속 그리움을 마주하는 이 순간이 훗날에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그리움이 될 수 있기에 의미 있는 시간으로 잘 써 내려가고 싶어졌다. 

바람개비 돌아가듯 흑백의 그리움을 돌려가며 소환되는 그 시절을 표현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장난기 많은 한 친구의 재치있는 언어 속에서 ‘바람이 머물다간 자리’라는 명언이 나왔다. 바람개비가 돌아간다는 것은 바람이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기억의 한 자락을 돌리며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지금은 ‘그리움이 머물다간 자리’가 되었다. 그 소중한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우리가 있고, 변화의 시작은 어쩌면 매를 맞았던 그 시절 그것이 억울함이나 화가 아니라 자신을 채찍질하고 성장하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을 알아차린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다. 오늘도 힘겹게 자신을 영글어 가고 있는 수많은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튼실하게 붉은 기 머금은 대추처럼 자신만의 색을 입혀가고 있는 지나온 삶을 응원한다. 그리고 가느다란 줄기 의지하며 버텨내느라 애썼다.

 김영숙(상담학 Ph.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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