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학] 겨울바람, 희망이여 안녕
[삶과문학] 겨울바람, 희망이여 안녕
  • 조현정(시인)
  • 승인 2022.09.19 18: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현정(시인)

당신은 말을 멈췄죠. 아마도 내가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던 모양이에요. 당신이 가장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던 거죠. 당신은 주먹을 귀 높이까지 올렸다가 내렸어요. 당신은 내 두 어깨를 쥐고 흔들었어요. 알았지. 알았어? 당신이 고함을 지르는데도 내 귀에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당신이 내 어깨를 흔드니까 내 고개가 저절로 끄덕거렸을 뿐인데 당신은 그것이 승낙인 줄 알았던 모양이에요. 하긴 살면서 단 한 번도 당신의 명령에 대해 거역하거나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당신은 당신 맘대로 내 대답을 결정했던 거예요. 늘 그랬던 것처럼. 

송지은 소설가의 단편집 《푸른 고양이》에 수록된 작품 중 ‘겨울바람’이다. 남편은 내연녀와 어딘가를 가다가 사고를 냈고 아내에게 운전자가 되라고 협박을 하는 장면이다. 그는 이기적이고 야비한 남편의 전형이고 그녀는 그런 이를 남편으로 둔 무기력하고 삶에 주눅 든 아내의 전형이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여성과 아이들의 이야기는 많은 소설작품에서 다루어졌지만 유독 이 작품 속 화자인 ‘나’의 편이 되는 건 섬세하게 그려진 내면의 목소리 때문이겠다. 울음을 초월한 듯한 목소리.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 없는 가정폭력 살인사건 속 그녀들의 독백은 언제나 강렬하게 슬프다. 《푸른 고양이》의 일곱 개의 이야기는 대부분 억압되고 소외된 존재들의 극한 상황 속 삶을 다룬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겨울바람’은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새로운 기법을 입혀 만들어진 한 편의 단편영화 같다. 쇼팽의 겨울바람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폭력. 전 세계인의 트라우마. 인간이 인간에게 휘두를 수 있는 폭력이 어디까지 잔혹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극한의 현장.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며 그것은 죽어서야 벗어날 수 있다고 호소한다. 우리의 참혹한 날들도 그에 버금가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일제탄압, 전쟁이 그랬고 5.18 민주화 운동, 4.3항쟁, 국가폭력이 난무하던 공화국 시대……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그랬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극은 사람들에게 너무 큰 고통을 감내케 했다. 폭력은 진화하고 언젠가는 들통이 났지만, 사람들은 웬만한 상처와 고통에 무뎌져 갔다. 식탁을 뒤엎는 남편과 자식들을 끌어안고 울음을 삼키는 아내, 식구들을 향해 골프채를 휘두른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꽃다발을 사 오는 남편과 맞을 짓을 했다며 되레 미안해하는 아내가 에피소드로 떠돌았다. 거기에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 불륜은 덤. 잊을만하면 연예인의 학교폭력 가해 전력이 인터넷을 물들이고 제2 n번방은 세상을 비웃으며 피해 아동을 물색하고 있었다. 폭력은 질기게 살아남는다. 김승희 시인은 ‘희망이 외롭다’에서 희망은 종신형이라고 했다. 나는 폭력에 한해선 희망이 재심 청구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본다. 

조현정(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