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단독 공개!] 고문서를 통한 18세기 19세기 춘천 시·공간 여행 (2)
[최초 단독 공개!] 고문서를 통한 18세기 19세기 춘천 시·공간 여행 (2)
  • 허준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 승인 2022.09.26 18: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문서를 통해 본 춘천 인물 탐구 - 송의, 박주국, 정도복

김현식 소장 고문서에는 다양한 인물이 춘천을 배경으로 얽히고설켜 있다. 인물의 관련성을 풀어내고 그 이유를 밝히려면, 고난도 퍼즐을 맞출 때의 수고와 인내가 필요하다. 고문서는 한자(漢字)라는 상형문자로 표현되어 있어서, 고사(古事)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를 추적하여 진실을 밝혀보려는 결심과 인내심 없이는 그 결과에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해당한다.

춘천에는 고문서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을뿐더러 고려나 조선 시대 춘천 재지(在地) 사족(士族) 연구가 아직 걸음마 단계여서 인물에 대한 학술 접근이 어려운 환경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냥 손을 놓고 세월만 보낼 수 없는 노릇인 현실 속에서, 김현식 소장 고문서는 이러한 난맥상을 헤쳐나갈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귀중한 자료가 된다. 즉 춘천 관련 인물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되기에 그 가치가 크다.

교지 유서諭書 諭守原襄道兼防禦使春川府使李鏶

김현식 소장 고문서 가운데 춘천 관련 주목할만한 인물로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宣祖)의 청천강 도하(渡河)를 목숨을 걸고 이루어낸 송의(宋檥), 삼대(三代) 효열(孝烈)의 집안이며 『이향견문록』에 춘천 대표 효자로 실린 박주국(朴柱國), 다산 정약용의 고조(高祖) 정도태(丁道泰)의 동생이며 춘천부사를 지낸 정도복(丁道復, 1666~1720)과 춘천부사를 지낸 이집(李鏶) 등이 있다.

 

1. 송의(宋檥) : 박세영이 지은 행장(行狀)과 신도비문(神道碑文)

송의(宋檥)는 조선 선조 때 무관으로 춘천시 사북면 송암리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송의의 일생을 기술한 행장을 지은 사람이 춘천 유생 박세영(朴世榮)이다. 

박세영은 춘천 동내면 거두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영암 박씨 박주국(朴柱國)의 증손이다. 박세영은 향시(鄕試)를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된 춘천 유생이며, 그가 향시를 치르며 제출했던 시권(試卷)이 김현식 소장 고문서에 있다. 박세영의 사촌 종형인 박내영(朴乃榮)의 향시 시권도 김현식 소장 고문서에 있으며, 박내영의 시권에는 향시의 일시(乙丑, 1865년)와 장소[원주原州]가 명시되어 있고, 아울러 세 명의 향시 감시관 이름도 기록되어 있어서 시권(試卷)의 전형(典型)으로 삼을만한 우수한 문건이다.

송의(宋檥)의 행장을 박세영이 지었음을 신도비 끝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지만, 행장이 문건으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다. 김현식 소장 고문서에 신도비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는 문건이 있다. 문건에는 ‘通政大夫行价川郡守宋公行狀’ 제목과 행장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고, 이를 신도비와 대조해 본 결과 신도비와 일치하였다. 다만, 행장이 신도비 3면 둘째 줄까지의 기록만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찾을 수 없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박주국 후손 가문에서 이 문건이 나왔고 문건 지질이나 형태로 보아 박세영이 직접 쓴 글로 판단된다.

행장 기록에 따르면, 송의가 임진왜란 발발한 1592년 당시 개천군수로 있었으며 선조(宣祖)는 서울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피난 가며 개천의 청천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을 건네줄 사공이 선조를 왜인으로 오해하고 강 건너편에서 오지 않았다. 이때 송의가 옷을 벗고 장검을 입에 물고 헤엄쳐 건너가, 사공의 목을 베고 배를 끌고 와, 선조는 무사히 강을 건너갈 수 있었다.

고문서 행장行狀 조선임진시개천군수 宋檥(진천송씨 춘천 입향조 송괄의 후손 춘천 고탄 송암산 가일리)의 행장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1596년 송의는 뇌물을 받은 죄로 의금부에 함숭덕 양응운 권극열 박인현 윤옹 이승남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공로를 세워 스스로 속죄하게 하라는 명을 받고 풀려난 일이 있으나 행장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행장을 통해, 송의의 공신녹권(功臣錄券)은 1605년 상촌(象村) 신흠(申欽)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고려말 춘천에 정착한 재지 사족 풍양 조씨 조개평(趙開平)의 후손 조사눌(趙思訥)의 여식과 혼인하여 슬하에 두 명의 아들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풍양 조씨와의 혼인은 송의의 할아버지 송괄(宋佸)이 춘천으로 낙향하여 지역에 기반을 앞서 쌓았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행장의 세부적인 기술을 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송의의 팔세손(八世孫) 송문욱(宋文郁)이었음이 행장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영암 박씨 박세영이 송의의 행장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진천 송씨와 영암 박씨는 춘천에 낙향한 시기와 낙향 연유 또한 비슷하며 여기에 두 집안은 통혼으로 가까운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송의의 행장 문건에 얽힌 사실의 규명 하나만으로 서울이나 근기 지역에서 낙향한 양반 세족들이 지역 향촌 사회에서 어떻게 정착하고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그들이 어떻게 변화해 나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것에서 지역사 규명에 있어 고문서의 가치를 살펴볼 수 있다.

 

2. 박주국(朴柱國, 1727~1764) : 「증조고가장초(曾祖考家狀草)」와 연명 상소 16건

 박주국은 영암 박씨 후손으로 춘천에 세거하던 춘천 대표 효자이다. 김현식 소장 고문서에는 박주국 가문 관련 문서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영암 박씨 가문의 춘천 정착 기록과 박주국의 효행 내용을 담은 「증조고가장초(曾祖考家狀草)」, 박주국을 위시한 가문의 삼대 효자 정포(旌褒)를 바라는 연명 상소 16건과 과시 답안지 2건 등이 주목받을 만한 문건이다. 

박주국의 증손 박세영이 지은 「증조고가장초(曾祖考家狀草)」에서 영암 박씨가 춘천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고려 초에 박근(朴根)이 낭주군(朗州君)으로 봉해졌으며, 상장군(上將軍) 박대장(朴大章)이 송경(松京:개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공조판서(工曹判書) 박보룡(朴寶龍)과 아들 판윤(判尹) 박영(朴營)이 모두 대관(大官)에 이르렀다. 선조 때 훈련부정(訓鍊副正) 박징(朴澄)이 원종삼등공신(原從三等功臣)에 이름을 올렸다. 훈련원정(訓鍊院正) 박몽량(朴夢亮)이 비로소 춘천으로 이사하였다. 박몽량의 아들이 박영(朴暎)이고 손자가 박동호(朴東皓)이다. <중략> 박동호의 아들 박리원(朴履遠 : 박주국의 부)은 태어나면서 성품이 인자하고 공손하면서도 말이 없었다.  < 「증조고가장초(曾祖考家狀草)」 일부 번역 >

박주국이 행한 효행은 유재건(劉在建,1793~1880)이 저술한 『이향견문록(異鄕見聞錄)』에도 전해지고 있다.

박주국은 춘천 사람으로 몸을 닦고 행동을 돈독하게 하였으며 즐겨 『소학(小學)』을 읽었고 어버이를 정성을 다해 섬겼다. 아버지가 이질로 여러 달 앓아 거의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원이 ‘오직 자라로만 치료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마침 장마철이어서 개울물이 크게 불어서 자라를 잡을 수 있는 길이 없자 울부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아버지가 혼미한 가운데 “신인(神人)이 나에게 ‘너에게 효성스런 아들이 있구나. 하늘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큰 자라를 너의 문앞 밭도랑에 내려보낸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즉시 그것을 잡아다 복용하니 아버지의 병이 바로 차도가 있었다. 아버지가 또 구운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박주국은 곧바로 근처 숲으로 가니 꿩 한 마리가 매에게 격추(擊墜)되어 있어서 그것을 가져다가 받쳤다.

『이향견문록』의 박주국에 대한 기록은 「증조고가장초(曾祖考家狀草)」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즉 가장초(家狀草) 문건이 『이향견문록』의 저본(底本)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도 지역사 재구(再構)와 지역사 연구에 고문서 발굴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박주국 가문 관련 삼대 효자 정포(旌褒) 연명 상소 16건은 지역 사회 세력이 중앙 정부를 상대로 하여 결집하여 그들의 주장을 어떻게 관철하였는가를 살피는 귀중한 자료이다. 박주국 가문 효자 정포 연명 상소는 1797년 시작되어 1851년까지 지속되었고, 철종 때인 1854년에 박주국에게 정려(旌閭)가 내려지면서 일 단락 되었다. 연명 상소에는 춘천 선비를 중심으로 강원도 전역의 선비 400명 이상이 참여한 춘천지역 사회의 큰 사건이었다. 춘천지역 사회를 포함한 강원도 전역 선비의 중앙 정부를 상대하는 큰 흐름을 이해하고 지역 사회에 이들이 차지하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3. 정도복(丁道復, 1666~1720)과 이집(李鏶, 1625~1691) : 교지(敎旨)와 밀부유서(密符諭書)

정도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태안 · 안주 · 춘천 등지의 지방관으로 재직하였을 때 선정을 베풀었던 인물이다. 반면 이집(李鏶)은 춘천 부사를 하였다는 기록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 인물이다. 

정도복과 이집 모두 춘천부사를 지냈다는 공통점 위에, 김현식 소장 고문서에 춘천부사 교지(敎旨)와 밀부유서(密符諭書)가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정도복은 다산 정약용의 고조할아버지 통덕랑 정도태(丁道泰, 1664~1713)의 동생이기도 하다.

정도복은 1714년 6월에 통정대부 행춘천도호부사(通政大夫行春川都護府使)로 교지를 받고서 춘천에 왔다. 반면 유서(諭書)에는 강원도겸방어사춘천부사(江原道兼防禦使春川府使) 직책을 부여하고 교지의 춘천도호부사 넓은 강원도 지역 방어사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 임무 수행 내용을 적고 있다. 

경은 한 지방을 체찰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병사 파견이나 기미 대응을 가벼이 하여서는 아니 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적(敵)을 제압하며, 한결같게 일상의 일에 응함에 스스로 옛 법도를 생각함이 있어야 한다. 혹 나(임금)와 경(卿)에게 있어 독단으로 일을 처치하고자 할 때는 밀부(非密符)가 아니면 시행할 수 없다. 또한 뜻밖에 간모(奸謀)로 예방하지 않을 수 없어서 비상(非常)의 명(命)이 있어야 함에 의심할 것도 없이 일치한 연후에 마땅히 명(命)을 따라야 하므로 제44부(符:비밀병부)를 하사하노니, 경은 수령 하여라. 이 때문에 유시(諭示)하노라.  <정도복 유서 전문 번역 >

이집(李鏶)은 정도복보다 42년 빠른 1672년에 통정대부행춘천도호부사(通政大夫行春川都護府使)로 교지를 받고서 춘천에 왔다. 유서에는 수원양도겸방어사춘천부사(守原襄道兼防禦使春川府使) 직책을 부여하여 정도복과 마찬가지로 춘천부사보다 넓은 강원도 지역 방어사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유서(諭書)의 내용은 정도복과 똑같고 비밀 병부 부여 번호가 제6호인 점만 다르다.

정도복과 이집에게 내려준 교지와 유서는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이는 선조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게 내린 밀부 유서가 보물 160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다.

허준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