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썩했던 장(場)거리의 중심, 율문1리

아뿔싸! 금요일 오전 10시 율문1리 경로당 문을 들어서는 순간, 야심 차게 준비한 첫 경로당 인터뷰가 벌써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로당이라면 항상 어르신들로 북적일 줄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어르신들의 다양한 사연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웃고 즐기는 모습을 담으려고 했지만, 율문1리 경로당에는 단 한 분의 어르신만이 계셨던 것이었다.

“누구예요?”

“아, 저는 《춘천사람들》이라는 춘천 지역 신문사에서 나왔습니다. 도움을 좀 받으려고요.”

“뭘 도와주지? 여하튼 들어와.”

들고 온 음료수 박스를 내려놓고 명함을 드리니, 이런 신문이 있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다름이 아니고요. 동네 이야기를 수집하려고 하는데, 경로당에 가면 다양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원래 이 시간에 이렇게 사람이 없나요?”

“지금은 없지. 점심때 되면 밥 드시러들 와. 나는 노인회 부회장이라 여기 문 열려고 일찍 온 거고. 그런데 동네 이야기는 나이 많으신 분들이 알지. 난 잘 모르는데?”

“혹시, 연세가……?”

“일흔일곱”

처음의 계획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렇게 첫 번째 ‘경로당 인터뷰’를 시작하게 됐다. 다음 회에는 원래의 계획대로 더 많은 어르신들과 대화하리라는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박민숙. 이 개울 건너 율문 4리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2003년도에 이리로 왔지. 지금까지 돈 벌어놓은 건 없는데 사람은 나처럼 많이 아는 사람 없어. 내가 활동을 많이 했어. 신북 농협 최초의 여성 이사도 했었고, 신북읍 선거관리위원장도 하고, 남자들 못 하는 것 내가 다 했지. 그리고 춘천시 농정심의위원도 하고. 그건 뭐 하는 거냐 하면 각 농가에 정부에서 보조금 주는 게 있어. 본인 부담은 한 10~20% 하고 나머지 정부에서 지원해 줘서 하우스도 짓고 또 과수 같은 것도 심어. 묘목 값이고 지지대값이고 다 해주고. 농가에 그 보조금 나가는 걸 농정심의위원이 심의를 해서 농가로 나가는 거야. 대학교수 둘, 농협조합장 넷, 농민 대표 이렇게 해서 심의를 해.

지역에서 활동을 아주 많이 하셨었군요.

지금은 춘천시 선거관리위원 딱 하나만 해. 왜 그걸 하느냐, 다 내려놓고 싶은데 선거 때가 되면 후보들이 찾아와서 죽겠어. 그러니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면 안 되잖아. 그래서 선거관리위원을 가지고 있으면 ‘나 선관위원이라 못해’ 핑계를 대는 거지. 그래서 다 내려놓고 그거 한 가지는 아주 수십 년째 하는 거야.

재밌네요. 그런데 여기 현판이 마을회관이던데요. 경로당과 통합이 된 건가요?

이거는 애초에 지을 때 마을회관으로 지었는데 2층을 몇 년 후에 또 지었어. 그래가지고 여기 아래는 마을회관, 2층을 경로당으로 썼어. 그런데 몇 년 지나다 보니까 할머니들이 다리가 아파서 계단 오르내리기가 너무 힘들어. 그래서 내가 ‘안 되겠다. 바꿔야겠다’하고 이리 내려왔지. 그래서 지금은 2층이 마을회관이야. 현판은 그대로지만. 정부에서 경로당에 쌀을 줘. 근데 10kg도 아니고 20kg짜리를 주거든. 그걸 들고 2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야 돼요. 좀 힘들어?

내려오고 보니까 여기 1층은 주방 시설이 없잖아. 그래서 내가 작년에 읍사무소 가서 경로당을 옮겼는데 저 주방 시설을 좀 해달라고 그랬더니 2층에 해서 안 된대. 그래도 내가 다른 예산에서 좀 빼든지 예비비로 하던지 꼭 해달라 그랬더니 400만 원을 투자해 가지고 해줬어.

율문리는 이름이 왜 율문리인가요? 혹시 밤나무가 많았나요?

글쎄, 한문은 밤율 자인데, 내가 알기로는 밤나무는 없었어. 왜냐하면 여기는 옛날부터 장터였어. 행정구역으로는 율문리지만 옛날부터 속칭 ‘장거리’라고 그랬어. 여기 장이 생겨서 장사해 먹고 사는 동네야. 말하자면 시골이 아니고 좀 도시지. 사람들이 여기 나와야 뭘 살 수도 있고 그래서 여기를 장거리라고 그랬는데 왜 율문이라 그랬는지는 모르지. 지금도 샘밭장에는 사람들 많이 와요. 오는 사람은 장날마다 오더라고? 살 게 있든지 없든지 장날마다 와.

어르신이 어렸을 때 장터의 모습은 어땠나요?

지금보다 장터가 더 활성화됐었어. 대형마트가 생기고 이러는 바람에 장이 좀 시시해졌지. 옛날에는 여기가 왕성했지. 또 구멍가게도 많았고. 길 사이로 양쪽으로 구멍가게가 쭉 있었어. 그 사람들이 다 그 장사해서 애들 가르치고, 먹고살고 그랬어. 지금은 그걸로 못 먹고 살아. 마트가 농협에 있고 그러니까 다 마트에 가서 사고 그래서. 젊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여기서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까 외지에 나가서 살고, 그래서 노인 인구가 많지.

경로당에는 보통 몇 분 정도 오시나요?

한 10분 정도? 노인은 많은데 아파서 못 오는 분도 있고, 생활이 바빠서 못 오는 분도 있고, 또 그냥 자기네끼리 그 동네에서 이렇게 모여 노는 사람들도 있고. 고정적으로 오시는 분은 한 10분 있지. 오시면 식사하고, 화투도 하고. 경로당 프로그램이 몇 가지가 있는데 우리는 이제 2층에 있을 때도 노래 교실을 신청했어. 그런데 코로나 생긴 뒤로 2년을 못 한 거야. 그런데 요새 프로그램을 다시 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노래 교실로 다시 하겠다. 강사는 어떤 사람을 원하느냐? 그전에 하던 사람을 보내 달라. 내가 그렇게 작성해서 냈지. 언제 보내주려는지 모르는데 서류가 마을마다 다 들어가면 이제 하겠지.

경로당 오시는 어르신들 연세가 많으시죠?

많은 사람은, 지금 90이야. 90 되신 분이 세 분 계셔. 네 분이 계셨는데 얼마 전에 한 분 돌아가고 이제 세 분이 있어. 그다음에 뭐 88, 87.

부회장님께서 좀 고생하시겠네요.

젊었으니까 궂은일을 내가 해. 내가 봉사 차원에서 이제 이걸 하는 거지. 우리 아버지가 행정직 공무원으로 계시다가 연세가 많아서 돌아가셨어. 내가 어려서 이렇게 보면 우리 집에 자주 손님이 찾아왔다가 가. 그러면 우리 엄마가 아버지한테 ‘그이는 왜 왔다 갔소?’ 그러고 물어봐. 그럼 아버지가 항상 하시는 말씀이 ‘다 자기네가 필요하니까 도와 달라는 소리 하러 왔지’ 그런 말씀이 계속 들리더라고. 내가 그런 걸 듣고 컸는데 지금의 내가 또 아버지처럼 살아.

율문1리에는 예전부터 하던 마을 축제 같은 게 있었나요?

서낭제 같은 걸 했는데, 여우고개에서 그런데 새로 도로 하고 그러는 바람에 서낭당을 치워버렸어. 그게 없어지고 이제 서낭제 같은 거는 없어졌지. 그래서 특별히 축제 같은 거는 없고 그냥 장터에서 하는 읍민의 날 행사하고 장터 창립 기념일 이 두 가지가 전부겠지.

혹시 어렸을 때 기억나는 장면이 있나요?

내가 1946년도에 태어났거든. 어려서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여기 미군들이 많이 주둔해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우리 조그만 것들이 졸졸 따라다니면 미군들이 껌도 주고 쪼꼬렛도 주고 그랬는데, 언제부터인가 미군들이 없어지기 시작하더라고. 그리고는 여기도 산업화 시대가 돼가지고 테크노파크 공장 그런 게 들어왔지. 거기가 옛날에 국군춘천병원 자리인데 공장이 들어와서 젊은 사람들이 일자리도 얻고 그랬어.

참, 내가 어렸을 적에 비가 너무 많이 와가지고 사랑 마을(율문4리) 언덕에 사는 사람은 괜찮고 이렇게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 다 물난리가 됐었던 기억이 있어. 나는 밑바닥에 살았는데 여기 이 동네 놀러 왔다가 물이 점점 늘어서 피란을 가라고 해. 그래서 저 천전리 상촌초등학교 강당에 있다가 물이 줄어서 내려와서 돌아간 그런 일도 있지. 지금은 댐이 생겨서 그런지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아. 

앞으로 바라시는 점이 있다면요?

나이가 많다 보니까 이제 뭐 바라는 것도 없고 그냥 각자가 건강하게 살다가 죽을 때 고생 안 하고 죽는 게 소원이야. 여기 노인분들이 말씀하시는 게 다 그래. 나도 그렇고. 오래 살면 첫째는 본인이 고생이고, 그다음에 자녀들 고생이니까. 그냥 지금은 아무 욕심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빨리 가는 게 제일이야. 그래서 연명(연명치료 거부 신청)들을 다 신청했어. 나도 한림대 병원 가서 했지.

홍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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