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운순(강원이주여성상담소장)

여성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가부장적인 위계를 확인할 때가 있다. 말하자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위계적 평등을 바탕으로 한 것처럼, 그래서 그들이 평등할 수 있는 인간에 여성과 하층민을 배제한 백인 중산층 남자만을 대상으로 한 것처럼 말이다. 

최근 여성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대회가 있었다. 마침 그 전국적인 대회에 준비팀장을 강원에서 맡게 되었고, 따라서 행사 전반과 함께 강사를 섭외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대회가 끝난 직후였다. 대표 책임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당일 강사가 대표급이 아닌, 활동가급이어서 ‘급’을 문제 삼는 활동가들의 민원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같은 활동가한테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한다는 후문이었다.

당일 강의를 진행한 사람은 그 방면에는 전문가라는 추천이 있었고, 강의 후 조사한 강의 만족도도 매우 우수했다. 강의 질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끝끝내 강사의 ‘급’을 탓하는 민원은 꽤 오래 지속 되었다. 내용을 보기보다는 그 사람이 가지는 신분에 따라 설득되거나 또는 배제하려는 집단의 위계에 실망했다. 무엇보다 불합리한 신분의 이득을 배제하고 민주적 평등의 가치를 실현해야 하는 여성주의 실천가 집단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한동안 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문득 ‘자산어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순조가 등극하면서 흑산도로 귀양을 간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서얼 출신의 젊은 어부 ‘창대’를 만난다. 창대는 공부를 하여 벼슬길에 나가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정약전에게 배우기를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400년을 이어 온 주자의 나라에서 임금도 없고 부모도 없고 제사도 안 모시고 이게 역적이랑 무엇이 다릅니까?”

정약전의 신분을 고려하지 않은 평등적 사고는 사실 창대에게 이로운 것이다. 그러나 당시 창대는 이를 알지 못했다. 이를 영화는 정약전을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주자는 참으로 힘이 세구나”

활동가 중에서 스스로를 향한 강의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일구고 향하는 더 나은 행위 중의 하나다. 또한 활동가 모두는 그렇게 될 수 있다. 스스로를 공부하는 존재로, 다 나은 존재로.

정약전의 시대로부터,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2세기가 흘렀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주자는 아직 힘이 세다. 어디 주자뿐인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