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라말 고려초라고 불리던 시기를 후삼국시대로 부르자는 제안이 설득력 있게 논의되고 있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에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던 호족의 존재가 궁금해진다.

이러한 춘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호족으로는 고려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고려서 열전을 보면, “왕유(王儒)는 본래의 성명이 박유(朴儒)이다. 자(字)는 문행(文行)이고,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다. 성품이 질박하고 곧으며,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처음에 궁예(弓裔)를 섬겨 원외랑(員外郞)이 되었고, 승진하여 동궁기실(東宮記室)에 이르렀다. 궁예의 정사가 혼란한 것을 보고 출가(出家)하여 산골짜기에 숨었다. 태조가 즉위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만나니 태조가 예(禮)로써 맞이하고 그에게 말하기를, “치리(致理)의 도는 오직 현자(賢者)를 구하는 데 있다. 지금 경이 오니, 부엄(傅巖)과 위빈(渭濱)의 사(士)를 얻은 것과 같도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관(冠)과 허리띠(帶)를 하사하고 국가 기밀의 중요한 관직을 관장하게 하였다. “공적이 있어 마침내 왕성(王姓)을 하사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기사 내용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전에 전문이 전재되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사 태조 5년(922) 11월 기사 “겨울 11월 신사 진보성(眞寶城) 성주(城主) 홍술(洪術)이 사신를 보내 항복하기를 요청하자 원윤(元尹) 왕유(王儒)와 경(卿) 함필(含弼) 등을 보내 위로하고 타일렀다”와 현손 왕자지(王字之)를 인용하여 왕유의 생애를 설명하고 있다.

알려진 내용으로 보면 왕유는 춘천에 세거하던 호족으로 생각되고 초창기에는 궁예와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왕권의 득세에 따라 왕건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왕(王)”씨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왕유의 거주지는 어디였을까?

후삼국시대 춘천 지역에서 활동하였을 호족에 대한 논의는 그동안 구체적으로 논의가 진행된 적이 없다. 이것은 고려사에서 보이는 왕유 관련 기록 외에는 역사 기록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후삼국시대 춘천지역 동향에 대한 연구가 자칭! 지역 연구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이에 비하여 고고학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가 확인되고 있다. 최근 소양로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발굴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통일신라시대 건물과 집자리, 고려시대 관청건물과 집자리, 도로가 확인되고 있다. 때문에 오래전 미군이 주둔하던 캠프페이지부지에 대한 조사가 완료되면 통일신라~고려시대 도시의 모습이 확인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연동하여 춘천 호족 세력이 생활을 하던 집자리도 확인될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물론, 발굴 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유물, 유구 등이 고려사에 출현하는 왕유(박유)와 관련된 것인지 100%로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화동과 소양로 일원에 대한 조사 결과, 후삼국시대 춘천지역 호족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유물이 확인된다는 것은 앞으로 춘천지역에서 진행되는 각종 개발 사업에 앞서 철저한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춘천 지역 호족의 근거지로 보이는 곳은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번개시장을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다. 도시재생사업과 함께 진행된 개발은 그동안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던 후삼국시대 호족집단의 거주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후삼국시대 호족의 존재 가능성이 확인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고려시대 건물지가 어처구니없이 인멸되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심재연 (한림대학교 한림고고학연구소 연구교수)


참고한 문헌

한백문화재연구원, 2020, 「춘천 소양로 93-8번지 유적」.

한국문화재재단, 2021, 「105. 춘천 소양로1가 92-26번지 유적」, 「2019년도 소규모 발굴조사 보고서ⅩⅩ」.

심재연, 2022, 「왕건사저와 봉선사」, 「태봉국 수도 철원의 관방유적」, 2022 태봉학술회의, 태봉학회․철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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