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정(시인)

“굳어버린 의식의 관성은 무섭지. 한번 세포에 깊이 박히면 죽을 때까지 그대로 이어지니까. 강철처럼 형성된 세포 속에서는 다른 상황을 받아들일 여유 공간이 전혀 없는, 내부가 완벽하게 꽉 찬 상태로 평생을 굴러가게 되겠지.” “그래도 선생님은 강릉의 모든 풍광, 심지어 일베충 수준의 사람들조차 버리고 싶지는 않죠. 모순된 언행이 아닐까요?” “사람을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는 없어. 삶 속에서 부대끼며 헤쳐나갈 수밖에 없는 긴 세월의 더께가 강릉 사람들 가슴에 깊게 자리잡고 있어. 이런 현상은 비단 강릉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일도 아니지만...”

박문구의 장편소설 《강릉, 겨울 그림자》. ‘비는 바람을 안고 작은 도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로 첫 문장이 시작된다. 비교적 평범한 첫 문장. 비바람 몰아치는 토요일 오후, 주인공 현은 삼척의 단골 대폿집에서 그림자로 다가온 청년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서캐와 디디티, 멸공방첩과 국한문혼용, 밴드부와 교납금 미납에 대한 에피소드로 중·고교 시절의 삶을 첫 번째 이야기에, 계엄과 유신이 선포되고 슬픈 결말로 치닫게 되는 대학 시절을 두 번째 이야기부터 일곱 번째 이야기까지 담아 회상한다. 에필로그까지 읽고 난 후에야 알았다. 첫 문장의 의미심장함을. 폐결핵에 걸리지 않았다면, 한서와 수우를 만나지 않았다면 완전히 다르게 펼쳐졌을 현의 삶. 그러나 예정대로 이야기는 흘러갔고 비극으로 치닫는 기저에는 ‘이근안’이라는 이름과 시대는 다르지만 <남영동1985>, <1987> 영화 속 고문 장면이 있었다. 언제나 강렬한 분노를 일으키는. 

‘강릉지역 의식의 한계’, ‘정부의 충실한 신민들이었던 대다수의 사람들’, ‘서울의 학생운동이나 재야인사들의 언행에는 지극히 부정적이었던 학생들’, ‘일베 수준에 버금갈 정도로 기울어진 사람들’의 세포에 깊이 박힌 의식의 관성은 강철처럼 단단하고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현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들을 ‘의식에서 베어내고 곪은 상처에 피 흘리면서 혼자 걸어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현은 ‘강릉 특유의 정체된 정서’를 깊이 이해하고 ‘근본은 참한’ 수많은 인영(人影)들을 내치지 않는다. 아무도(我無島)를 꿈꾸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단, ‘가장 웃기는 부류’는 제외다. 열 평쯤 되는 아무도라는 작은 섬에 10층짜리 역사각형 건물을 짓고 쓰임새를 상상하는 일. 파도에 밀려오는 말이 마르기 전에 누구도 없고 나도 없는 섬 위로 희망을 꿈처럼 올려세워야겠다는 <작가의 말>이 근사해서 여러 번 읽었다. 강릉의 겨울 그림자만이 아닌 춘천의 겨울 그림자를 돌아보다가 작가가 독자의 몫으로 남겨준 아무도의 건물 2층부터 9층의 쓰임새를 먼저 고민하고 앉아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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