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우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

《춘천사람들》에 연재했던 그림에세이를 모아 올 봄에 《물병자리 몽상가》를 낸 정현우 시인이 새 시집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을 펴냈다. 그림에세이가 그림과 글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는 압축된 형식의 책이라면, 이번 시집은 자신의 기억과 내면을 좀 더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독자들은 청·장년기를 훌쩍 보내고 어느새 나이든 시인의 다양한 기억과 삶의 길에서 체득한 성찰을 만날 수 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고독과 비애의 감정과 마주하게 되지만, 그의 언어들은 노년의 괴로움을 말할 때도 수다스럽지 않은 절제를, 전업작가로 살아가는 고독 속에서도 주변의 사물과 불우한 이웃에 대한 관심과 따뜻한 눈길을 작품으로 전한다. 인생의 연륜 때문일까?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기억의 단편들을 작품화한 자전적인 성격의 시가 적지 않다. 수복 지역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룬 작품이 특히 그렇다.

“이별은 그대와 내가/다른 별이란 걸 깨닫는 것//서로 다른 궤도를 돌다가/초저녁 산책길 라디오에서/함께 들었던 음악이 흐를 때/멀리서 글썽이는 별을 향해/손을 흔들어 보는 것” (〈이별〉). 기억의 묵은 창고에서 꺼낸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기억을 노래한 아름다운 서정시로 읽을 수 있지만, 춘천 공지천 공원에서 만난 노숙자에 대한 작품은 불우한 이웃에 대한 이해와 공감, 연민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쓸데없이 돌아다니다 아까운 술만 깬다’고 신참을 꾸짖는 왕초 노숙자로부터 자신도 막걸리 한잔 얻어먹고 ‘사글세, 카드빚 걱정없이’ 벤치에 누워 한잠 자고 싶었다’ (〈노숙자〉). 고독사한 사람들의 유류품을 치워주는 청소업체 사장의 티비 인터뷰 “고독사한 사람들의 방엔 모두 티비가 켜져 있었다”를 보고 쓴 〈고독사의 품격〉이라는 시도 있다. 그 후반부, “티비를 끄고 클래식 채널/ 에프엠 라디오를 켠다///문 안 잠그고 자라에 눕는다” 여기에는 홀로 사는 시인의 불안이 숨겨져 있다. 

노숙자, 고독사, 노년의 일인 가족 등의 문제는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는 사회적인 이슈이다.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공감력 저하가 날로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그의 시적 관심은 개인적 삶의 문제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이 사실은 이 시집의 큰 미덕의 하나라 할만하다. 삶의 고통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이웃과 타자의 고통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나이 들수록 짐을 버리고 버렸지만 “정작 버려야 할 것은/못 버렸다//1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에도/안 들어가는 노후” (〈짐〉). ‘치매검사도 해주고 임프란트도 두 대 해주고 안전지원도 해준다’는 ‘노인 기초연금 신청서를 받고 그는 이렇게 쓴다. “도 닦는/후배가 말했다/노인이 아니라 노자라고//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삶을 고귀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낫다//노자의 말 한마디에 노후가/새처럼 가볍다” (〈노자가 됐다〉). 양구 읍내 ‘행복식당’을 표제로 한 작품에서, 식당 주인에게는 번거롭지만, 다양한 메뉴를 갖추어 “제각각인 시민의 입맛을 최대한 맞춰주는” “(행복식당 같은)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시인은 소망을 노래한다.

춘천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담긴 그의 시집을 읽으면 예술은 역경과 고립, 고통 속에서 성숙한다는 오랜 명제가 생각난다. 그 시들이 독자에게 큰 울림을 주는 것은 거기에 삶의 연륜과 고투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성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를 겪어오면서 우리 주변에 경제적으로 남모르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고령사회에 접어들어 독거노인은 날로 증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전후의 궁핍한 시대에 태어나 현재에 이른 굴곡 많은 삶의 길을 걸어온 그의 이번 시집에서 독자들은 그 특유의 절제된 언어와 예술가적 기질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재확인할 수 있다. 정현우 시인의 건강과 건필을 빈다.

서준섭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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