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거들랑
비석 세우지 마라.
한 폭 베쪼각도
한 장 挽歌도
통 걸지 마라.
술값에 여편네 팔아먹고
불당 뒤에서
친구의 처를 강간하고
마지막엔
조상의 해골을 파버린 사나이
어느 산골짜기에
허옇게 드러내 놓은 채
개처럼 죽어 자빠진
내 썩은 시체 위에
한 줌 흙도
아예 얹지 마라.
이제
한 마리 까마귀도 오지 않고
비바람 불며
번갯불 휘갈기는 밤
내 홀로
여기 나자빠져
차라리 편안하리니
오! 악의 무리여
모두 오라.
박기원은 1908년생으로 강릉사람이다. 현대시를 쓴 강원도 1세대 시인이겠다. 유교의 유습을 받으며 태어나 살았던 이가 쓴 처절한 묘비명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자아성찰이라 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철저한 윤리의 실현이라 해야 할까.
처를 팔아먹는 삶이야 일제의 침략 이전에도 몇 년 기근이면 있었던 일이다. 동년배 김유정의 1930년대 소설에도 등장한다. 친구 처를 강간하고, 조상 무덤 파헤친 파락호는 당대 신문 사회면에 더러 등장도 한다. 그가 생각한 악의 모습일 게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향하는 건 다른 문제이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악을 드러내는 건, 보들레르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그가 시를 쓰던 당대는 식민지 침탈기와 동족 전쟁인 6.25를 겪은 시기다. 그 와중에도 자연 속 음풍농월을 노래하고 외롭다고 고독하다고 징징대는 시가 대부분일 때, 이런 성찰은 드물었다.
번갯불이 휘갈기는 것은 시적 화자의 묘비명일 게다. 유교적 하늘은 그의 묘비명에 뭐라 적었을까? 하늘도 내 잘못이라 하지 않았을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여린 시인의 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