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통제하려는 정부, 국민이 슬퍼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게 해

10월 29일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에 핼러윈을 즐기려는 다수의 인파가 몰리면서 300명이 넘는 압사 사상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현재 사망한 희생자의 수가 157명에 이른다. 우리는 도대체 세월호 참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는가? 이 참사에 대한 정부의 행태를 보면 배운 거라곤 이런 대형참사를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한 제도적 법적 장치나 행정력이 아니라, 이런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정권의 책임을 덜 수 있느냐에 골몰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즈음에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다시 말해 국가의 책임은 없고 슬픔을 이용하는 이데올로기만 난무하는 듯해서 하는 소리이다. 

정부에서는 국민애도를 한다고 했지만, 총리를 포함해서 처음에는 이번 참사에 대해서 참사라 하지 말고 사고 즉 인시던트(incident)라고 규정하고, 피해자, 희생자라고 하지 말고 사망자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그리고 리본도 근조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하라는 지침을 내리기도 하였다. 사고, 사망자라고 부르고 리본에서 근조라는 글자를 뺀다고 해서 정부 책임이 없어지는 것인가? 희생자들이 그 시간 그곳에 간 것 말고 죽음으로 되돌려 받아야 할 잘못인가? 우리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건을 사고 관광을 하고 축제를 즐기는 것은 그런 시스템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 그런데 정부가 그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국민이 정부에 대한 믿음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정부가 애도기간을 정하고 대통령이 연일 합동분향소에 조문해도 국민이 그 진정성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처럼 이번에도 희생자 대부분은 젊은이들이었다. 자식 앞세우는 부모의 비통함은 헤아릴 수조차 없기에, 그 마음을 일컬어 참척(慘慽)의 고통이라 한다. 세간에는 총리나 대통령이 자식이 없어서 자식이 먼저 죽는 슬픔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지만 설마 그렇기야 하겠는가. 작가 박완서는 “자식을 앞세우고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처넣는 자신을 생각하니 징그러워 토할 것만 같았다”고 참척의 고통을 쓰고 있다. 따라 죽지 못하는 자신이 한스러워 술로, 눈물로, 수면제로 단장(斷腸)의 고통을 하루하루 견딘다고도 했다. 스스로 미치지 않는 게 저주스러워 수녀원에서 20여 일 동안 ‘하느님과 대결하며’ 살았다고도 했다. 다산 정약용도 자녀 9명 중 6명을 먼저 보냈는데, 그는 억여행(憶汝行)이라는 시에서 “네가 병마에 시달릴 때, 아비는 진주 촉석루에서 놀고 있었다”며 “방탕했으니 재앙 받아 마땅한 일, 어찌 너를 여의는 벌을 면할 수 있으리”라고 자책한다.

어떤 평론가는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감은 한국인이 장점으로 지닌 정서적 특징이다. 그런데 정부가 국민의 감정까지 통제하려 든다. 슬픔이 전국민적인 애도 분위기로 이어지고 분노로 전환될까 경계한다. 프랑스 사회운동가의 ‘분노하라!’라는 일갈을 새겨듣지 않더라도 우리가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원칙과 가치를 위해. 그러나 이렇게 해야 우리의 목숨이 지켜지는 각자도생의 사회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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